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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 편 [해뜨는 정동진]

소렌 5 2182
해뜨는 정동진


임정숙



아침에 일어나면 해뜨는 하늘이 싫었다. 어느 날 불쑥 닥친 적나라한 현실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은 몸처럼 당혹스러웠다. 베란다의 버티칼 사이사이로 해가 한 줌씩 비집고 들어오면 하루의 밝음이 원망스러웠다.



세 아이들이 현관에서 낯설게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로 한바탕 빠져나가면 부부만 남은 썰렁한 거실에선 신문을 말없이 뒤적이는 홀쭉해진 남편의 등과 내 속만큼 가스 렌지 위에 뿌글뿌글 끓어오르던 커피물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분명, 밤잠을 설쳤음에도 남편은 이른 아침 이슬을 적시며 산을 올랐다. 오전 대부분 출근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 휑한 아파트 주차장의 한산함은 그의 마음을 꽤나 스산하게 했을 것이다. 자동차마저 한 구석에서 주인 따라 늙은 노인처럼 생기를 잃고 푹 꺼져 기력을 잃은 듯 했다.



홀로 선 중년의 나무 한 그루. 짙푸르던 무성함도 아낌없이 떨구느라 이젠 허허로운 들판 같아, 피곤하고 외로웠을 텐데... 그의 줄기를 타고 가지에 매달린 초롱한 눈망울들. 쉬어가고 싶어도 마땅히 쉴 그늘은 아직 없다.



어느 날은 내 어깨가 더 무거워 보였나, 언제 피였는지 연분홍 진달래 몇 가지 꺾어 와 머쓱하게 내밀곤 북한 여자처럼 머리에 꽂아 보라며 어설픈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창 밖 푸른 녹지대에 벚꽃이 분분히 날리어 온통 보도 블록이 눈부시게 하얀 꽃길이 되어도 눈에 들어 올 리 없었다. 마음놓고 몽롱한 새 봄의 아름다움을 탐하기엔 사치스러운 시간이었을까. 상대적인 초라함 때문인지 오히려 더 깊은 시름만 젖게 했다.



강 건너 불 보듯 남의 일이라고만 방관하던 일이 내 앞의 일로 닥치고 보니 막막했다. 한동안 어두운 불황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더니 남편의 부서는 회사내의 축소라는 의미로 사라져야 했다. 의기투합, 마지막까지 힘을 모으던 가장들의 외로운 노력도 맥없이 무너져 낙엽처럼 뿔뿔이 흩어져 재기를 꿈꿔야 했다.



어수선한 고민 끝에 택한 건 소규모 사업이었다. 시댁 조카의 기술을 밑천으로 자금을 투자하고 이 삼 년 기반을 잡으면 전망이 괜찮을 업종이었다. 남편은 대외적으로 나름대로의 전략과 이미지로 신뢰감을 얻어선 지 초반치고는 성공적으로 거래처를 틀 수 있었다. 아직은 큰 수익을 기대하긴 성급한 시기였지만 모든 일이 상당히 호전적으로 풀려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 만이었다. 철없는 조카녀석의 사고로 뜻하지 않게 낙관적이었던 사업은 황당하게도 복잡한 어려움을 몰고 오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때의 아득함이란... 남편의 머리는고통을 말해주듯 어느새 하얀 소금밭이 오소소 내려앉았다.



그 와중에 남편에게 유달리 호의적이던 거래처의 사장이 자기 일에 동업을 제안해 왔다. 주변인들의 자문을 구한 결과 장래가 보이는 아이템에 나도 마음이 동했다. 앞날이 암담했던 차에 솔깃한 손짓이었다. 외형상 그의 사업장은 활발히 돌아가고, 서류상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동업의 위험을 우려하는 눈빛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계약금을 건넬 약속 날짜만 남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동업자의 눈빛이 처음과 달리 점점 낯설게 다가와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돌다리도 두들겨 가보는 예민함이라기엔 꺼림직 했다. 여자의 본능적인 예감인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고 돌아보니 지금도 두 번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검은 그림자일 뿐이었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궤도를 벗어나, 몇 고비의 풍랑에 아득했지만 고통의 끝도 모르고 허덕이는 이들에 비하면 일년이란 세월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사업장을 넘기는 과정에서도 뜻하지 않는 일에 휘말릴 땐 세상의 혼탁함에 주저앉아 하루가 십년처럼 착잡하고 우울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다행히 남편은 예전보다는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고통을 내릴 땐 또 다른 일을 예비하기 위함이니 모든 일에 그저 담대하라 했던가.



얼마만의 여행인가, 벼르던 겨울바다였다. 그간의 신산스러웠던 기억들이 야수처럼 포효하는 파도 품에 일순간 묻혀지는 듯 했다. 새벽, 얼얼한 정동진의 바닷바람은 쨍한 쾌감으로 몸서리까지 쳤지만 불확실한 시간들로부터 이젠 해방이란 안도감은 가슴 벅찼다.



행운이었는지 난생 처음으로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해돋이의 감격을 만끽했다. 말갛게, 장엄하게, 눈부시게 서서히 장막을 걷어내며 움틀 대던 그 고행 속에 피어오른 아름다움. 눈물이 핑 돌았다. 빛 때문에 상처받기를 두려워했던가, 가끔은 인생의 헛발도 내딛고 살진대... 절벽 같던 세상, 어둠을 고뇌하며 새벽 여명 속에 더 찬란히 빛난 소생의 기쁨을 정동진에서 뜨겁게 해후할 줄이야...





5 Comments
박금애 2003.02.21 13:20  
  잘 읽었습니다. 저희집은 IMF때 재정보증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가족끼리 더 이해하고 그 전보다 더 화목해졌습니다.
종적을 감춘 그분께 원망에 앞서 언젠가 진 빚이라면 갚아서 좋고 아니면 다음에-----.
이젠 그런 모든 일이 감사롭기까지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운명의 새벽이 오기전에는 칠흑같은 밤을 지내야한다."라는 글이 떠오르는군요.
분명 소렌님이 보신 소생의 기쁨인 정동진해를 영원히 간직하소서. 
 
deborah 2003.02.21 14:55  
  개인 사업(?)이라는 거창한 명분아래 23년 동안 그 마누라로 살다보니 어려운 고비가 많이 있었습니다.저의 낙천적인 성격으로도 해결이 안 나는 일들이 생깁디다.그러나 오래 믿고 기다리면...! 소렌님 안녕 ^*^
소렌 2003.02.21 22:23  
  박금애 님...아픔도 감사해 하는 님의 마음이 참 아릅답습니다. 힘들땐 정동진 해를 떠올립니다. 어둠을 고뇌하며 떠오르던 그 감격을...
드보라 언니...개인사업을 한다는 일이 만만치 않더군요. 아주 잠깐의 경험이지만.
23년?  에그, 전 엄살을 피웠네요. 믿고 기다리면 쨍하고 해뜰 날 있겠죠^^**
맑은눈동자 2003.02.22 18:05  
  사람들에게 고통을 내릴땐 또다른 일을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그저 담대하라고 ... 저도 2년전 그런 힘듦이 있었죠  그날이 오늘이네요
지금일어나고 있는  많은 주변의 일들도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싶군요
소렌 2003.02.22 22:59  
  맑은 눈동자님, 동병상련의 마음이군요. 고통은 더 단단해지기 위한 과정인 듯 싶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까짓 함께 놀아 주자구요. 씩씩하게...감사드립니다. 글 남겨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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