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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글 남깁니다

김경석 7 815
싸나이님 소개로 이곳을 알게되어

제겐 많은 도움이 돼내요

노인복지회관서 가곡을 가르치며 힘들었는데

이 싸이트로인해 많은 도움이 됍니다

다음주에는 "명 태"를 가르처야 하는데

조금 망막 하내요.

"명 태"에대하여 조금이라도 도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너무 부족해서 작은 것이라도 꼬리말 부탁드려요

매 주 수요일 오전에 가르치는데 그전에 부탁드립니다

평안한 금요일 되셔요  감사합니다
7 Comments
정우동 2006.04.08 11:26  
  변훈 선생에게는 명태 말고도 벼룩이라는 코믹도 있습니다.
이용수 선생한테서 같이 술마신 이야기서부터
변훈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仁과 답은 멀리있지 않습니다.
싸나이 이선생께 여쭈어 보시지요
싸나이 2006.04.08 11:30  
  경북 안동.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9월, 종군기자 양명문씨가 김동진씨와 함께 여관방에 머물고 있던 변훈씨를 찾아와 자작시를 건네주며 작곡을 권유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1952년 부산에서 오현명씨에 의해 초연된 이 곡은 쓰디쓴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현제명과 홍난파류의 가곡에 익숙해 있던 음악계의 몰이해와 냉대, 거기에다가 작곡자가 음악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편견이 한편을 거들어 이 극적이고 서사적인 노래를 홀대했던 것이지요. 이에 실망한 작곡자는 잠시 음악을 포기하고 직업외교관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는 연희전문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었거든요. 그러다가 70년대 말 음악평론가 서우석씨에 의해 "언어의 억양과 사실성에 충실한 노래"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재평가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는 음악계의 얘기이고요 진짜 풍류를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평가 훨씬 이전에 이 노래를 즐겨 불렀었지요. 물론 주로 술좌석에서였지만.) 이어 박용구씨가 이 곡을 "홍난파·현제명류의 여성적·애상적 가곡에서 탈피한" "40년대 이 땅에 리얼리즘 가곡의 씨앗을 뿌린 김순남·이건우의 맥을 잇는 듬직한 산봉우리"라 극찬하면서 한국인의 애창가곡으로 자리를 잡아갔지요. 이를 계기로 변훈씨는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음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싸나이 2006.04.08 11:35  
  2000년 8월 29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별세한 변 훈(邊 焄)은 작곡가로서 한국가곡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변 훈(邊 焄)에게 '명태'는 한국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표작인 동시에 쓰라린 추억이 단긴 가곡이다. 또 그가 음악을 포기하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명태' 때문이기도 하다.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휘자 정종길에게 작곡을, 바리톤 최봉진에게 성악을 배운 그는 외교관의 길로 접어들기 전부터 작곡에 심취, 1947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금잔디'를 첫 작곡한 데 이어 윤동주 작시의 가곡 '무서운시간'(48년), 양명문의 '낙동강'(51년), 시인 김광섭의 '차라리 손목잡고 죽으리'(52년) 등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했다.



1952년 변훈은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되는 <명태>를 바리톤 오현명을 통해 부산 극장에서 첫발표회를 가졌다. 고달픈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버린 명태에 빗댄 풍자가이기도 한 '명태'는 탄생하자마자 세인들의 숱한 빈정거림을 받았다.



베이스 오현명(吳鉉明)이 부른 이 곡을 듣고 음악 평론가 이성삼(李成三)씨가 연합신문에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하나'라는 평론을 써 변훈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남성적이고 너무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변훈의 '명태'였기에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해 있던 그 당시 음악계의 몰이해와 냉대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작곡자가 전문 음악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편견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어쨋든 그는 그 이후 음악을 접고 외무부에 특채돼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리톤 오현명은 '명태' 발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 해군 정악대에 복무 중이던 어느날, 나보다는 세 살 아래인 邊씨가 악보 뭉치를 들고 찾아 왔어요. <귀향의 날><낙동강'>등 여섯곡의 가곡이 들어 있었죠. 노래를 부르던 친구가 작곡도 하나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중 유난히 눈길이 간 노래가 <명태>였어요. 하지만 발표 때 객석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 소리를 듣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죠."

또 오현명은 "고인(변훈)은 선이 굵은 성격의 소유자"라며 "음악계의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나그네처럼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대구에 가면 '녹향'이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우리 가곡 중 걸작으로 칭송받는 변훈의 가곡 ‘명태’의 노랫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동리가 부산 ‘밀다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6·25 피란시절(1951년), 이중섭·최정희·양주동·박계조와 함께 대구 ‘녹향’에 파묻혀 지내던 당시 종군기자였던 시인 양명문이 ‘녹향’ 다탁(茶卓)에서 써내려간 ‘명태’ 시를 변훈이 건네 받아 곡조를 붙인게 바로 '명태'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전음악감상실 1호를 서울의 옛 ‘르네상스’ 감상실쯤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실지 모르나 그보다 더 오랜 원조가 1946년 대구 향촌동에서 문을 열었고 지금도 대구 중앙로의 대구극장 맞은편에서 영업 중인 ‘녹향’이라는 곳이라고 한다.(수 년전 신문에서 우연히 '녹향'에 관한 기사를 보고 대구에 내려갔을 때 찾아가 인사를 드린 이후부터 대구에 내려갈 때면 시간 나는대로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초연이 실패로 돌아간 '명태'가 한국 가곡사의 획을 긋는 수작으로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 음악 평론가 서우석(徐友錫)은 <문예중앙> 80년 겨울호에 쓴 '음악과 사실성'이라는 글에서 <명태>를 '언어의 억양과 사실성에 충실한 노래'라고 극찬했다. 이어 음악 평론가 박용구(朴容九)도 "홍난파, 현재명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서 탎피한 <명태><쥐> 등은 40년대 이 땅에 리얼리즘 가곡의 씨앗을 뿌린 김순남, 이건우의 맥을 잇는 듬직한 산봉우리"라고 평가했다. 그가 외교관으로 해외 공관 이곳 저곳을 다니는 동안 천덕꾸러기였던 <명태>는 점차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귀한 몸'이 되었다.



오현명의 독창회에서 으레 앙코르곡으로 불려지며, 오현명이 무대에 설 때면 객석에서 '명태!'를 연호하는 청중이 늘 있게 마련이라고 한다. 어부에 잡힌 명태의 입장에서 쓴 해학적인 노래말은 이전에 없던 신선함과 함께 '한국적인 和聲(화성)'을 창출했다는 음악적 새로움도 간과할 수 없다. 작 곡가 李旭(이병욱)은 "명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 가곡이라 내세울 수 있는 곡이 생겼다. 봉선화로부터 이어온 이전의 가곡들은 사실 우리 색깔 이 없었다"고까지 말했다.



이에 고무된 변훈은 81년, 28 년간의 직업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여의도에 '오페라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을 연 뒤 '시와 노래와 그림과'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차례씩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주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년 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뒤 음악에만 전념할 정도로 가곡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했다.



양중해 작시의 '떠나가는 배'와 김영삼의 '귀향의 날'을 비롯한 전쟁 또는 실향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들과 '설악산'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노래들도 그의 음악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시인 정공채(鄭孔采)와 콤비를 이뤄 전국을 누비면서 조국 산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임진강' '한강' '한려수도' '한라산' 등의 노래에 담아내기도 하고, 김소월의 '초혼',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명시(名詩)의 가곡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외교관 시절에도 작품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와 '바다의 소곡',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은퇴 이후에도 '갈매기 우는구나'(정공채 시), '쥐'(김광림 시), '춤의 판타지아'(정한모 시), '낙엽끼리 산다'(조병화 시)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여왔다.



지병을 앓기 시작한 10 여년전부터 작고하기전까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비롯한 성가 위주로 작품활동을 벌여왔다. 그의 작품들은 "서양음악에 창과 아악, 시조, 민요같은 전통음악 기법을 도입, 동양적 색채를 풍기는 독특한 멜로디를 지니고 있으며, 노랫말 또한 중시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노래"라는 게 음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故 변훈은 우리가락의 풍류와 해학, 애뜻한 사랑이 충만한 민족을 노래한 작품을 창작, 가곡계 발전에 공헌한 점이 공로로 인정돼 화관문화훈장으로 추서됐다.
수패인 2006.04.08 13:01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음악 가곡을 무척 사랑하셨던 분이셨군요.
저는 명태를 고등학교때 어느 음악회에서 들었는데 참 해학적이고도
재미있는 곡이라 느꼈는데 초연때의 반응은 썰렁 했었군요.
이곡 생각하면 머리속에 동해바다에서 노젓는 어부가 떠올려집니다.
정우동 2006.04.09 19:23  
  우아! 이 선생 놀랍습니다.
그렇군요, 변훈 선생의 곡은 쥐이고
내가 착각한 벼룩은
무소르그스키의 벼룩의 노래가 바른 것 입니다.
.
김경석 2006.04.12 03:52  
  형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보답할길이 없내요
그래도 자주 도움주셔요
그리고 요쯤 오페라 공연 스케줄 때문에 합창단을 못나가고 있내요
그래도 시간을 나누어 참여 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이혜영 2006.04.12 10:58  
  전 그저 명태라는 노래구나하고 듣기만 했는데...
좋은 노래만 접하는 것이 아니고,
노래에 관한 상세한 얘기 감사합니다.
덕분에 알고 들으니 더 새롭고 좋으네여.
좋은 곳 가르쳐 주신 수패인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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