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그 걸림돌을 넘어서...
십여 년 전 3월이었다. 인수인계를 받기 위해 전임자와 나란히 책상에 앉아있었는데 그때 여고생이던 k양이 오더니 내 전임자에게 말했다.
‘언니, 그만 둔다면서? 서운해요’ 하더니 이어서 하는 말,
‘그런데 50대 아줌마가 온다는데 정말이에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거의 화까지 난 표정이었다.
‘여기 계시잖아’
전임자가 나를 가리키자마자 그녀는 놀라서 얼굴을 감싸 쥔 채 황급히 나가버리고 뒤에 남은 나는 낭패스럽고 주눅이 들어 참담하기까지 했다. 일어나서 그냥 나가고 싶었다. 안 그래도 오십이라는 나이에 새로운 직장, 그것도 지금까지 젊은이들이 감당해오던 일을 하게 되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차에 첫날부터 그런 일을 당했으니 기가 팍 꺾일 수 밖에.
사회통념상 일을 맡기기에 부적합한 나이였음에도 어쩐 일인지 받아들여졌을 때 나는 오히려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괜찮겠느냐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교회 사무실 일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잡다한 것이어서 소소한 행정에서부터 수많은 교인들과 교회를 찾는 외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많아 전문적이진 않아도 상당한 집중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어설프고 낯설고 주눅까지 들었던 초창기를 지내며 다행히 차츰 일이 익숙해지자 나이로 인한 주위의 우려도 어느 정도 씻어지고 오히려 연륜의 무게가 빛이 날 경우도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시절보다 더 성실해졌고 일하는 즐거움이 생동감이 되어주는 탓인지 나이를 잊고 젊게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오십대 후반이 되었을 때, 나는 이상한 자격지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IMF 이후, 많은 젊은 실직자들이 생겼을 때 나이도 많은 내가 이렇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왠지 미안해질 무렵, 사소한 실수에 누군가 내 나이를 들먹이자 속으로 무척 노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실수, 일테면 깜빡 할 수도 있는 일들이 나이 탓으로 돌려지면 정도 이상으로 화가 나고 억울했다. 나이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처럼 나를 자극하는 말은 없었다. 그러면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직장생활을 접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갔다.
그러던 차에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일만 그만둔 게 아니라 아예 나라를 떠나 외국행을 감행했다. 혹독한 시행착오였다. 어이없이 돌아온 나는 다시 일을 갖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육십이 가까운 나를, 더구나 전문지식이 없는 나를 누가 써줄 것인가. 그때는 이렇게도 쓸모가 없나 싶어 스스로를 폐기처분하고 싶기까지 했다.
아침에 눈을 떠 일하러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공허하고 쓸쓸한 일이었다. 다행히 두 달 여 만에 작은 기획사에 들어가 청첩장 문안 입력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복잡한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에 섞여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고 불안하기만 하던 정서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직장에서도 같이 일하던 젊은 동료 못지않게 주어진 일을 잘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많은 나이 덕이었던 것 같다.
2년 몇 개월 후, 나는 다시 전에 있던 일터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를 다시 불러주신 뜻이 어디 있던지 간에 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해 주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와 통념으로 볼 때 육십이 되어서 다시 부름을 받았다는 일은 그만큼 신기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나이는 내 걸림돌이다. 지금도 나는 나이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하지만 하나의 구성원으로써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편치 않음을 넘어서서 늘 감사함과 기쁨을 준다.
그래서인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곧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만한 일이 없지만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은 가끔 받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그날이 나는 두렵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 할 수 있을 때라도 최선을 다 하려 마음먹을 뿐이다. 나이, 그 걸림돌이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언니, 그만 둔다면서? 서운해요’ 하더니 이어서 하는 말,
‘그런데 50대 아줌마가 온다는데 정말이에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거의 화까지 난 표정이었다.
‘여기 계시잖아’
전임자가 나를 가리키자마자 그녀는 놀라서 얼굴을 감싸 쥔 채 황급히 나가버리고 뒤에 남은 나는 낭패스럽고 주눅이 들어 참담하기까지 했다. 일어나서 그냥 나가고 싶었다. 안 그래도 오십이라는 나이에 새로운 직장, 그것도 지금까지 젊은이들이 감당해오던 일을 하게 되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차에 첫날부터 그런 일을 당했으니 기가 팍 꺾일 수 밖에.
사회통념상 일을 맡기기에 부적합한 나이였음에도 어쩐 일인지 받아들여졌을 때 나는 오히려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괜찮겠느냐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교회 사무실 일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잡다한 것이어서 소소한 행정에서부터 수많은 교인들과 교회를 찾는 외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많아 전문적이진 않아도 상당한 집중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어설프고 낯설고 주눅까지 들었던 초창기를 지내며 다행히 차츰 일이 익숙해지자 나이로 인한 주위의 우려도 어느 정도 씻어지고 오히려 연륜의 무게가 빛이 날 경우도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시절보다 더 성실해졌고 일하는 즐거움이 생동감이 되어주는 탓인지 나이를 잊고 젊게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오십대 후반이 되었을 때, 나는 이상한 자격지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IMF 이후, 많은 젊은 실직자들이 생겼을 때 나이도 많은 내가 이렇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왠지 미안해질 무렵, 사소한 실수에 누군가 내 나이를 들먹이자 속으로 무척 노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실수, 일테면 깜빡 할 수도 있는 일들이 나이 탓으로 돌려지면 정도 이상으로 화가 나고 억울했다. 나이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처럼 나를 자극하는 말은 없었다. 그러면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직장생활을 접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갔다.
그러던 차에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일만 그만둔 게 아니라 아예 나라를 떠나 외국행을 감행했다. 혹독한 시행착오였다. 어이없이 돌아온 나는 다시 일을 갖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육십이 가까운 나를, 더구나 전문지식이 없는 나를 누가 써줄 것인가. 그때는 이렇게도 쓸모가 없나 싶어 스스로를 폐기처분하고 싶기까지 했다.
아침에 눈을 떠 일하러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상당히 공허하고 쓸쓸한 일이었다. 다행히 두 달 여 만에 작은 기획사에 들어가 청첩장 문안 입력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복잡한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에 섞여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고 불안하기만 하던 정서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직장에서도 같이 일하던 젊은 동료 못지않게 주어진 일을 잘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많은 나이 덕이었던 것 같다.
2년 몇 개월 후, 나는 다시 전에 있던 일터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를 다시 불러주신 뜻이 어디 있던지 간에 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해 주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와 통념으로 볼 때 육십이 되어서 다시 부름을 받았다는 일은 그만큼 신기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나이는 내 걸림돌이다. 지금도 나는 나이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하지만 하나의 구성원으로써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편치 않음을 넘어서서 늘 감사함과 기쁨을 준다.
그래서인지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곧 마음을 다잡는다. 나는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만한 일이 없지만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은 가끔 받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일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그날이 나는 두렵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 할 수 있을 때라도 최선을 다 하려 마음먹을 뿐이다. 나이, 그 걸림돌이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