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의 강물
내 맘의 강물
내가 그 노래를 배운 건 1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나의 첫 번째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산책을 하다가도 부르고 산에 올라가서도 부르며, 밤에 관사 마당 끝에 있는 진도견 도리에게 밥을 주러 나갔다가도 부르곤 합니다. 그 노래는 이수인 작사, 작곡의 ‘내 맘의 강물’이라는 가곡입니다.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이 노래를 부르면 내 맘에 강물이 흐릅니다. 노래를 부르며 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기도 합니다. 구불구불 강물을 따라 오르면, 어릴 때 발가벗고 미역 감던 개울물을 거쳐 졸졸대는 계곡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산골마을은 이 노래를 가르쳐 준 그와 내가 어릴 적에 자라던 곳입니다.
나는 고개 이쪽 언덕에서 살았고 그는 고개 너머 골짜기에 살았습니다. 나는 수시로 그 골짜기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매어놓은 소를 끌러 가기도 하고, 골짜기 위에 있는 자갈논과 더 위에 있는 비탈밭을 가자면 그곳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삼태기로 피라미를 잡으러 가기도 하던 곳입니다. 그 골짜기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건 우리 외삼촌네 집이었고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외사촌형입니다.
그곳에는 유난히 꾀꼬리가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 우리가 언덕배기 나무에 올라 새 놀이를 할 때면 형은 늘 꾀꼬리가 되곤 했습니다.
‘닐니리-곡!’
그 노래를 부르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형이 흉내 내던 꾀꼬리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골짜기엔 새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외삼촌네는 도시에 나가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귀농인이었습니다. 논밭이 제대로 있을 리도 없었지만 일손이 잡히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외삼촌은 허구한 날 술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장터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꼭 우리 집에 들려 바로 위 누님인 우리 어머니를 붙잡고 술주정을 했고, 그때마다 곤히 자던 조카는 바로 코 위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고, 반복되는 하소연을 들어야 했습니다. 먹고사는 사정이 좋을 리가 없었고, 외사촌 형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질 못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강물을 타고 오르면 그렇게 외삼촌의 그 술주정 소리가 들리고, 몹시 가난한 시골 소년의 모습이 보입니다. 노랫말처럼 ‘비바람 모진 된서리로 마음 아팠던 자욱’들입니다.
그 산골마을에서 도시를 가자면 강을 타고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나는 강물을 타고 내려옵니다.
형은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도 못하고 다시 그 골짜기를 떠났습니다.
강물을 타고 내려가 춘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를 해서도 외참촌네는 사정이 좋아지질 않았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상경하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에도 형은 공장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을 하지 않은 학력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독학을 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형은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어릴 적 살던 골짜기, 그가 흉내 내던 꾀꼬리에게서 전수받았는가 보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고, 또 즐겨 불렀습니다. 어쩌면 노래는 그의 질곡의 삶을 헤쳐나가게 한 원동력이요, 윤활유였는지도 모릅니다. 역시 독학으로 음악을 배우고 노래를 익혀, 시립 합창단에서도 활동하고 가곡 콩쿠르에도 나갔습니다.
CD를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식으로 녹음실에서 취입을 한 것이 아니라 반주곡을 구해 거기에 맞춰 집에서 녹음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전문성악가 음반을 뺨칠 정도입니다.
그의 노래는 장르를 넘나듭니다. 동요, 유행가에서부터 가곡, 오페라의 아리아도 부릅니다. 그가 부르는 그 다양한 노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느린 곡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조(哀調)가 깔려 있고, 어릴 적 골짜기에서 배고파 울어대던 뻐꾸기 울음소리도 배어 있는 듯합니다.
그의 이런 노래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내 맘의 강물’입니다. 그가 방송국 가곡제에 나가 우수상을 받은 노래이기도 한데, 곡이 좋아서인지 가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형은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부른다고 했고, 나도 그가 부르는 노래 중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 그건, 그 산골에서 발원한 강물이 그의 마음속이나 내 마음속이나 똑같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의 강물을 타고 흘러갑니다. 노래를 부르면 고향에서 그 형과 지내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타향살이 청소년 시절, 그리고 군생활을 해 온 지난 세월이 강물에 떠오릅니다. 지나간 자국마다 마음이 아프지만, 강물 곳곳에 아롱아롱 빛나는 진주알도 박혀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또 언뜻언뜻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노래를 부르는 건 아픈 자국보다는 그 빛나는 진주알을 보기 때문이요, 어쩌면 산다는 건 이렇게 아픔 속에서 빛나는 진주알을 발견해 내는 일일 것이라고…. (조병설)
*배경음악은 외사촌 지춘섭이 부르는 '내 맘의 강물'입니다.
내가 그 노래를 배운 건 1년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나의 첫 번째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산책을 하다가도 부르고 산에 올라가서도 부르며, 밤에 관사 마당 끝에 있는 진도견 도리에게 밥을 주러 나갔다가도 부르곤 합니다. 그 노래는 이수인 작사, 작곡의 ‘내 맘의 강물’이라는 가곡입니다.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이 노래를 부르면 내 맘에 강물이 흐릅니다. 노래를 부르며 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오기도 합니다. 구불구불 강물을 따라 오르면, 어릴 때 발가벗고 미역 감던 개울물을 거쳐 졸졸대는 계곡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산골마을은 이 노래를 가르쳐 준 그와 내가 어릴 적에 자라던 곳입니다.
나는 고개 이쪽 언덕에서 살았고 그는 고개 너머 골짜기에 살았습니다. 나는 수시로 그 골짜기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매어놓은 소를 끌러 가기도 하고, 골짜기 위에 있는 자갈논과 더 위에 있는 비탈밭을 가자면 그곳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삼태기로 피라미를 잡으러 가기도 하던 곳입니다. 그 골짜기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건 우리 외삼촌네 집이었고 그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외사촌형입니다.
그곳에는 유난히 꾀꼬리가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 우리가 언덕배기 나무에 올라 새 놀이를 할 때면 형은 늘 꾀꼬리가 되곤 했습니다.
‘닐니리-곡!’
그 노래를 부르며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형이 흉내 내던 꾀꼬리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골짜기엔 새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외삼촌네는 도시에 나가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귀농인이었습니다. 논밭이 제대로 있을 리도 없었지만 일손이 잡히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외삼촌은 허구한 날 술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장터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꼭 우리 집에 들려 바로 위 누님인 우리 어머니를 붙잡고 술주정을 했고, 그때마다 곤히 자던 조카는 바로 코 위에서 나는 술 냄새를 맡고, 반복되는 하소연을 들어야 했습니다. 먹고사는 사정이 좋을 리가 없었고, 외사촌 형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질 못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강물을 타고 오르면 그렇게 외삼촌의 그 술주정 소리가 들리고, 몹시 가난한 시골 소년의 모습이 보입니다. 노랫말처럼 ‘비바람 모진 된서리로 마음 아팠던 자욱’들입니다.
그 산골마을에서 도시를 가자면 강을 타고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나는 강물을 타고 내려옵니다.
형은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도 못하고 다시 그 골짜기를 떠났습니다.
강물을 타고 내려가 춘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를 해서도 외참촌네는 사정이 좋아지질 않았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상경하여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에도 형은 공장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을 하지 않은 학력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독학을 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형은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어릴 적 살던 골짜기, 그가 흉내 내던 꾀꼬리에게서 전수받았는가 보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고, 또 즐겨 불렀습니다. 어쩌면 노래는 그의 질곡의 삶을 헤쳐나가게 한 원동력이요, 윤활유였는지도 모릅니다. 역시 독학으로 음악을 배우고 노래를 익혀, 시립 합창단에서도 활동하고 가곡 콩쿠르에도 나갔습니다.
CD를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정식으로 녹음실에서 취입을 한 것이 아니라 반주곡을 구해 거기에 맞춰 집에서 녹음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전문성악가 음반을 뺨칠 정도입니다.
그의 노래는 장르를 넘나듭니다. 동요, 유행가에서부터 가곡, 오페라의 아리아도 부릅니다. 그가 부르는 그 다양한 노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느린 곡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조(哀調)가 깔려 있고, 어릴 적 골짜기에서 배고파 울어대던 뻐꾸기 울음소리도 배어 있는 듯합니다.
그의 이런 노래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내 맘의 강물’입니다. 그가 방송국 가곡제에 나가 우수상을 받은 노래이기도 한데, 곡이 좋아서인지 가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형은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부른다고 했고, 나도 그가 부르는 노래 중 가장 좋아합니다. 아마 그건, 그 산골에서 발원한 강물이 그의 마음속이나 내 마음속이나 똑같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의 강물을 타고 흘러갑니다. 노래를 부르면 고향에서 그 형과 지내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타향살이 청소년 시절, 그리고 군생활을 해 온 지난 세월이 강물에 떠오릅니다. 지나간 자국마다 마음이 아프지만, 강물 곳곳에 아롱아롱 빛나는 진주알도 박혀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또 언뜻언뜻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노래를 부르는 건 아픈 자국보다는 그 빛나는 진주알을 보기 때문이요, 어쩌면 산다는 건 이렇게 아픔 속에서 빛나는 진주알을 발견해 내는 일일 것이라고…. (조병설)
*배경음악은 외사촌 지춘섭이 부르는 '내 맘의 강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