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가로 가는 길
샘 가로 가는 길
그 길은 달개비 풀이 무성한 샘물이 있는 곳까지 잔잔하게 이어져 있었다.
샘물은 야산의 능선이 아래로 흐르다 문득 멈춰선 지점에
" 나, 여기 있어요."
하는 듯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그 샘물을 마셔보진 않았는데
샘물 바로 아래로 연결되는 샘의 수로가
온통 짓 푸른 풀들로 우거져 있어 보이지 않는데다가
햇빛에 너무 오래 노출되어 있어
권태로움을 자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부근의 풍경은 참으로 고요하고 서정미 넘쳐,
어느 날 홀로 걷기도 하였지만 아이들과 재잘거리며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샘으로 가는 길은 보드랍고 포근한 연한 황갈색의 평화스러운 길인데,
길가로는 작은 풀들이 오송송한 꽃잎들을 달고는 언제나 가냘프게 바람에 떨고 있었고,
듬성듬성 서 있는 조금 더 키가 큰 노란 꽃을 매단 야생화는 제법
어린이다운 장난기 있는 정직한 자태로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뽐내며 서 있었다.
그 길로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닐고 거닐었다.
아직도 그 길에는 봄이 한창이어서 어디를 막론하고
화사한 봄기운이, 그러나 아득한 추억을 머금으면서,
요염하고도 정숙한 자태를 자아내고 있을 터였다.
산기슭, 언덕 너머 보이는 야산, 그리고 낮은 골짜기로
이어져 있는 논--. 들---.
손에 잡힐 듯 드리워져 있는 아카시아 나무의 거칠면서도 가녀린 가지와
그 사이에 수줍게 자리한 한 그루의 노란 산수유,
이런 곳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내다 버린 철제 캐비넷마저도
- 쓰레기장에 버려졌다면 추하고 더러웠을 형상과 녹들마저도-
어떤 아득한 향수마저 자아내는 것이니
그 또한 우수 머금은 눈동자로 정감을 품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지라, 옅은 주기(酒氣)에라도 들라치면
언제라도 달려가고픈 심정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풍경과, 지난 해 아내와 아이들과 나물 캐던
그 들판이 또 이 산수유가 바라보는 골짜기 옆으로
연이어져 있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대기와 봄 들판에
아이들의 소곤거리는 모습이 겹쳐질 때는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폭' 하고 새 나오고 마는.
새벽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산 향기와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연푸른 안개가,
책상머리에 달라붙어 끙끙 앓던
치열한 밤의 피로를 어느 결에 기억도 없이 지워주던,
푸르스름한 간지의 얇은 막이 깔려 있던 그 길과,
그 길의 두어 걸음 뒤로 성큼 다가서던 커다란 나무들.
그리고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목행리 밤길을 걸은 기억이 떠올라, 그날 밤은
너무도 달이 밝아, 발 아래의 모래까지도 훤히 비춰 보였는데,
그 길은 옅은 황색의 비단 같은 고운 길이었다.
요즘처럼 진달래라도 핀 봄밤엔, 진달래 달빛 속에
일렁이는 꽃 그림자를 벗으로 삼아
한잔의 화주(花酒)를 마다하지 않을 수 없어,
부르기도 전에 달려가 뜯어보는 연애편지를 기다리는 마음과도 같은
조바심으로 찾곤 하는 그 곳!
기대고 앉은 진달래의 발 아래로 나있는
샘 가로 이어지는 그 길은, 마치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거닐던
달빛의 그 목행리 기억과 전혀 어긋나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차마 가슴 저미는 그 밤길의 정경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곳인데,
더구나 이 길을 지나 골짜기 한 면을 가느다랗게 긋고 있는 철로가 있어
목행리의 철길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철로 너머로는 또 다른 낮은 산들이
하늘을 겹치면서 연연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어서,
오늘 아침 같이 희미한 연무가 휘뿌려지는 날에는
그 골짜기 한쪽을 울리며 지나는 기차소리가
층층이 이어지고 있는 산들의 주름을 대하듯
내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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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해 이른 봄,
새벽,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던 기차소리를 듣고
몇 자 끄적거렸던 것을 올렸습니다.
회원님들의 봄은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목행리'는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