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가족나들이를 하고
세딸과 우리부부 이렇게 다섯 식구가 모두 함께하는 가족나들이는
그동안을 살면서도 채 한손 손가락을 꼽을 정도만큼도 가져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가족들의 원망을 듣기에 말문이 막히고 땀을 빼도록 미안합니다.
아직도 살림보다 무거운 부담을 지고 가계까지 꾸려가는
아내가 잠시 쉬고, 시집간 막내 딸이 오고, 놀토 만난 두딸이 합류하여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 백운계곡에 있는
이름 그대로 조성되어 있는 숲속의요정 펜션(www.elfpension.com)으로 갔습니다.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요술나라 치장을 한 뾰족뾰족한 6각탑을 가진 집들이 대부분인데
우리는 공의 반쪽 돔을 가진 아라비아풍의 천정이 높은 집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가까운 봉평읍에 있는 이효석문학관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너무 많이 주차해 있어서 가히 자동차나라라 하여도 좋을 허버나라에
잠시 들렸다가 이효석 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읽은 물레방아터 마을을 지나
이효석문학관을 탐방할 수 있었습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대해 왔던 곳이기에
전시된 명품이 분명한 만연필로 단정한 필체로 칸을 메운 선생의 육필원고지들과
둘째 따님이 정성스레 선친의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귀중한 자료철과
가산선생의 작품들과 당대의 문학인들의 작품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서재에 놓인 축음기와 피아노로 보아서 선생의 가세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선생에 대한 가족들의 존경과 사랑과 이해가 각별했음을 읽을수 있었습니다.
전시실을 보고 마당으로 나오니
전시되어 있던 저 중절모를 멋지게 쓰고 안경을 낀 지성적인 용모에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 입은 신사가 의자에 앉아서,
당신의 옆에 또 의자를 놓아두고, 사진 찍기를 권하길래 그렇게 했습니다.
문학관에 드나들며 본 문학비 전면의 可山李孝石文學碑는
동반문학가로 활동하고 일세를 풍미한 유진오 선생의 명필휘호였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생가를 찾으니 넓은 마당에 꾀나 큰 규모의 기와집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이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가
기와지붕이 되고 다시 하중때문에 지금은 가벼운 개량기와를 이고 있었습니다.
지난날 철되면 메밀꽃이 하얀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정갈하던 곳이
조용하고 단아하게 살아 온 선생의 생가라면 사색의 터가 되어 마땅하지만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사철내내
메밀꽃 간판을 내걸고 검은 메밀꽃을 피우고 있는 장사속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동안을 살면서도 채 한손 손가락을 꼽을 정도만큼도 가져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가족들의 원망을 듣기에 말문이 막히고 땀을 빼도록 미안합니다.
아직도 살림보다 무거운 부담을 지고 가계까지 꾸려가는
아내가 잠시 쉬고, 시집간 막내 딸이 오고, 놀토 만난 두딸이 합류하여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 백운계곡에 있는
이름 그대로 조성되어 있는 숲속의요정 펜션(www.elfpension.com)으로 갔습니다.
동화속의 이야기처럼
요술나라 치장을 한 뾰족뾰족한 6각탑을 가진 집들이 대부분인데
우리는 공의 반쪽 돔을 가진 아라비아풍의 천정이 높은 집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는 가까운 봉평읍에 있는 이효석문학관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는 길에 너무 많이 주차해 있어서 가히 자동차나라라 하여도 좋을 허버나라에
잠시 들렸다가 이효석 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읽은 물레방아터 마을을 지나
이효석문학관을 탐방할 수 있었습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대해 왔던 곳이기에
전시된 명품이 분명한 만연필로 단정한 필체로 칸을 메운 선생의 육필원고지들과
둘째 따님이 정성스레 선친의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귀중한 자료철과
가산선생의 작품들과 당대의 문학인들의 작품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서재에 놓인 축음기와 피아노로 보아서 선생의 가세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선생에 대한 가족들의 존경과 사랑과 이해가 각별했음을 읽을수 있었습니다.
전시실을 보고 마당으로 나오니
전시되어 있던 저 중절모를 멋지게 쓰고 안경을 낀 지성적인 용모에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 입은 신사가 의자에 앉아서,
당신의 옆에 또 의자를 놓아두고, 사진 찍기를 권하길래 그렇게 했습니다.
문학관에 드나들며 본 문학비 전면의 可山李孝石文學碑는
동반문학가로 활동하고 일세를 풍미한 유진오 선생의 명필휘호였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생가를 찾으니 넓은 마당에 꾀나 큰 규모의 기와집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이 함석지붕으로 바뀌었다가
기와지붕이 되고 다시 하중때문에 지금은 가벼운 개량기와를 이고 있었습니다.
지난날 철되면 메밀꽃이 하얀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정갈하던 곳이
조용하고 단아하게 살아 온 선생의 생가라면 사색의 터가 되어 마땅하지만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사철내내
메밀꽃 간판을 내걸고 검은 메밀꽃을 피우고 있는 장사속 현실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