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 바리톤님의 글을 읽고...
스물 서넛 시절에 그 사람을 봤지요.
서늘한 이마에 우수에 찬 눈빛, 물들인 군용점퍼를 입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학교 뒷뜰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샛길을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사무실 창문으로 가끔 내다보며 그가 좋아졌어요.
순전히 마음이 몹시 끌리는 그림을 좋아하듯이 말입니다.
반정부 데모가 일상이던 시절, 언제나 선봉장이 되어
주먹 불끈 쥐고 구호 외치는 열정적 모습도
배구시합 때 강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날렵한 모습도
멀리서 훔쳐보기만 하며 가슴 한 구석에 그냥 담아두었지요.
젊음이 그런 일을 가능케 했고 숨겨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든 것이겠지요.
그가 졸업을 하고 나도 그곳을 떠난 얼마 후
먼발치로 우연히 봤을 때도 바바리 깃 올려 세우고
잡지 한 권 말아 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보암직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해 선거철에 길을 가다 벽보 하나 문득 눈에 들어 왔어요.
이름 석 자가 낯익어 그 사람의 약력을 꼼꼼하게 살펴봤어요.
그러자 유난히 깊은 눈빛을 지닌 순수하고 지적인 얼굴 하나.
기억 속에서 살아나옵니다.
반가움에 얼른 사진을 자세히 봅니다.
멋지게 머리를 빗어 넘기고 넥타이 단정히 맨 초로의 남자가
나와 마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력을 보면 분명 그가 맞는데
사진 속의 인물은 전연 그가 아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나이의 흔적이 너무 심하게 보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사람이 그란 말인가?'
내 마음을 뒤흔들던 그 눈빛을 우선 찾아봤습니다.
그 시절, 깊은 생각에 잠겨 시린 듯 우수가 서려있던 눈빛을 기억하면서...
그러나 사진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의 눈은
아무 의미 없이 탁해 보였습니다. 우수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요.
뿐만 아니라 조금쯤 흐트러져 반듯한 이마 위에 드리웠던 머리는
반짝 반짝 윤기까지 흘리며 올백으로 넘겨져 몹시 상투적으로 보였으며
얼굴 전체에 욕심과 거드름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되려고 자신의 사진을 화려한 약력과 함께 내건
그의 얼굴에서 출세와 영달을 추구하며 살아온 그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때처럼 묻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옛날, 불의에 대항하여 데모를 하고 늘 사색에 잠겨 있던
허름한 잠바 차림의 아름다운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요?
돌아서는 발길이 조금 힘이 빠지더군요.
아무리 혼자 그 모습을 좋아했지만 그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보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마저 맛보면서..
그가 변한 게 무슨 큰 잘못도 아닌데...
내게 남겨진 그의 젊은 날의 초상이 뭐 그리 대수라고...
혼자 웃음이 났어요.
다 그놈의 무정한 세월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젊은 시절의 순수한 모습은 끝까지 지니지 못한다 해도
그런 식으로 변해버리면 안된다고 왜 자꾸 나무라는 마음이 드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일에도 마냥 설레이던 여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아련한 추억에 잠길 수 있었던 것은
팍팍하고 메마른 삶에 잠깐 신선한 바람이 되어주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