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우정
영원한 우정
나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최대의 저주라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죽마고우(竹馬故友)란, 요즘처럼 놀이기구가 없었던 옛날, 아이들이 대나무를 말처럼 타고 논데서 생긴 ‘격이 없는 옛 친구’를 뜻하는 말이다.
중국 제(齊)나라에도 관포의 사귐(管鮑之交)이란 말이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젊은 시절 동업자였다. 내란이 일어나자 관중은 규(糾)공자를 섬기고, 포숙은 소백(小白)공자를 섬겼는데 소백이 환공(桓公)으로 즉위하여 자기 목숨을 노렸던 관중을 참수하려하자, 포숙이 간하여 중용토록 천거한다.
이에 환공이 그를 기용했는데 능력이 출중하여 후에 재상이 되고 환공은 천하의 패권을 잡게 된다. 그것은 포숙이 관중을 천거하고 자기는 아랫자리에서 그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중은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고 말했다니 그게 바로 지기(知己) 아니랴.
우정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역사에도 있다. 오성(李恒福;1556~1618)과 한음(李德馨;1561~1613)은 어려서부터 친구사이로, 1580년에 오성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한음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급제했으며, 1583년 이이(李珥)의 천거로 독서당에서 같이 공부(賜暇讀書)를 하면서 우정이 더 깊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항복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또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한음 이덕형 또한 임란 때 임금을 모시고 따른 공로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좌의정에 오르고 또 대마도 정벌을 주장하여 영의정이 되었던 분이다.
이 두 대감에 대한 선조의 사랑이 남달랐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오성과 한음이 늘 서로 아비라고 농담을 했는데 하루는 선조가 내가 부자를 가려주지하고 끼어들었다.
종이쪽지에 아비부(父)자와 아들자(子)를 써서 접어놓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씩 고르도록 했는데, 먼저 한음이 펴보고 “제가 아비입니다”라고 소리쳤다. 다음에 오성이 펴보고 종이쪽지를 무릎 위에 놓고는 껄껄껄 웃는지라 임금이 까닭을 물은 즉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무릎 위에 앉혔으니 아비 된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으리까” 한다. 오성의 재치에 선조도 크게 웃었다는 얘기는 새겨들을 만하다.
내게도 친구가 있다. 사업상 늘 대하던 사람, 같은 취미로 만나는 사람, 동창회 친목회 향우회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 내 친구다.
그러나 작전 중의 전우가 아닌 이상 생명을 같이 할 수 는 없을지라도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아니 서로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되냐고 묻는다면 얼른 다섯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중에 우선 내 초등학교 동창인 이종규라는 친구가 있다.
이름도 나와 비슷하지만 둘이 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똑같다.
그는 어린 시절 다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은 일제 때부터 우리고향에서는 제일 큰 양곡 보관창고와 도정업을 하셨던 대 사업가셨고, 내 선친은 법원에 근무하셨는데 두 분도 서로 절친한 사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에 월반하면서 동기생들이 자연이 멀어졌지만 이 친구만은 학년과 관계없이 우정이 더욱 깊어 갔다.
그러던 중 우리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일시에 가세가 기울었다.
부모님의 직업에서 받은 영향인지 그는 공대를, 나는 법대를 진학했지만 학비를 거의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부조리한 사회, 썩은 정치에 울분을 참지 못한 우리는 손수레에 마이크를 장치하여 끌고 다니며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외쳐댔으니 요즘말로 미화하자면 민주항쟁인 셈이다.
그 뒤로 나는 혈혈단신 상경, 취직하여 동료 여직원과 가정을 이루고, 공대출신인 그는 국내 직장을 마다하고 파독 광부의 길을 택하여 대구출신의 진실한 규수를 만나 독일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독일 남부 알브스타트(Albstadt)에 섬유공업이 한창 번창할 때 식당을 경영하여 부를 이루고, 또 태권도가 8단인 그는 시청 체육관을 빌려 독일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나라의 이름을 떨치는데도 한몫을 했으니 누가 일찍이 그의 맘속에 도사린 꿈을 짐작이나 했으랴.
내가 결혼 적령기에든 어렵던 시절, 나보다 먼저 결혼하여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친구신혼부부 방에 신세졌던 일이 두 번 있었는데, 내가 결혼하여 남의 협실에 살 때 한 방에서 같이 잔 건 이 친구뿐이다.
융프라우 구경을 마치고 인터라켄에서 딸네 식구들을 만나 염치불구하고 그 친구 집으로 찾아갔다. 커다란 지하실이 딸린 독일 전통가옥 3층에 마련해준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벽에 걸려있는 뒤러(Albrecht Duerrer;
1471~1528)의 ‘기도하는 손’ 조각품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젊은 시절 미술공부가 꿈이었던 뒤러는 학비가 없어 친구와 의논한 결과 친구가 먼저 돈을 벌어 대주고, 뒤러가 공부를 마치면 친구의 학비를 대주기로 약속을 했다. 뒤러는 미술공부를 마치고 친구의 일터로 찾아갔다. 그 때 친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오 하느님이시어! 저는 그동안 가혹한 노동으로 손마디가 굵어지고 굳어져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 친구 뒤러만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도와주소서······
뒤러는 연필을 꺼내 험한 친구의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진실한 한 친구의 힘이 알브레히트 뒤러란 세계적인 화가를 만들었고, 아름다운 우정이 불후의 명화 ‘기도하는 손’을 탄생시킨 것이다.
거기 머무는 이틀 동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의 고향인 칼브(Calw),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 의류점을 하고 있는 생가와 기념관, 하이걸러(Haigerlocher)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을 연구했다는 비밀 지하 동굴, 그 외 여러 곳을 그의 안내로 둘러봤다.
바짓가랑이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는 왕자호동의 가슴도 찢어졌다더니 며칠만 더 쉬었다가라는 치레가 아닌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는 내 가슴도 아쉬웠다.
-여기서 뉘른베르크까지는 얼마나 되지?
-약 60킬로 쯤 될 거야 가보고 싶냐?
-아니 저 ‘기도하는 손’의 작가 뒤러의 고향이라서 물어본 거야!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차에 올랐다.
25년전, 독일방문 때 체재비 모두를 부담해주던 일, 허약한 내 아내를 위해 필요한 약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 보내주던 정성, 이번에도 내가 소화가 잘 안되고 딸꾹질이 난다 했더니 인턴인 아들을 데리고 8시간을 달려 온 우정, 등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독일제 등산화를 선물이라며 사주던 자상한 배려, 물론 마음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돈이 있다 해서 다 하는 것이 아니란 것쯤 나도 알 나이다.
재산을 쌓기보다 모든 친구들에게 인간적인 정을 쌓아가는 벗, 그의 생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나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최대의 저주라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다.
죽마고우(竹馬故友)란, 요즘처럼 놀이기구가 없었던 옛날, 아이들이 대나무를 말처럼 타고 논데서 생긴 ‘격이 없는 옛 친구’를 뜻하는 말이다.
중국 제(齊)나라에도 관포의 사귐(管鮑之交)이란 말이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젊은 시절 동업자였다. 내란이 일어나자 관중은 규(糾)공자를 섬기고, 포숙은 소백(小白)공자를 섬겼는데 소백이 환공(桓公)으로 즉위하여 자기 목숨을 노렸던 관중을 참수하려하자, 포숙이 간하여 중용토록 천거한다.
이에 환공이 그를 기용했는데 능력이 출중하여 후에 재상이 되고 환공은 천하의 패권을 잡게 된다. 그것은 포숙이 관중을 천거하고 자기는 아랫자리에서 그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중은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고 말했다니 그게 바로 지기(知己) 아니랴.
우정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역사에도 있다. 오성(李恒福;1556~1618)과 한음(李德馨;1561~1613)은 어려서부터 친구사이로, 1580년에 오성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한음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급제했으며, 1583년 이이(李珥)의 천거로 독서당에서 같이 공부(賜暇讀書)를 하면서 우정이 더 깊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항복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또 두 왕자를 평양까지 호위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한음 이덕형 또한 임란 때 임금을 모시고 따른 공로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좌의정에 오르고 또 대마도 정벌을 주장하여 영의정이 되었던 분이다.
이 두 대감에 대한 선조의 사랑이 남달랐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오성과 한음이 늘 서로 아비라고 농담을 했는데 하루는 선조가 내가 부자를 가려주지하고 끼어들었다.
종이쪽지에 아비부(父)자와 아들자(子)를 써서 접어놓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씩 고르도록 했는데, 먼저 한음이 펴보고 “제가 아비입니다”라고 소리쳤다. 다음에 오성이 펴보고 종이쪽지를 무릎 위에 놓고는 껄껄껄 웃는지라 임금이 까닭을 물은 즉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무릎 위에 앉혔으니 아비 된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으리까” 한다. 오성의 재치에 선조도 크게 웃었다는 얘기는 새겨들을 만하다.
내게도 친구가 있다. 사업상 늘 대하던 사람, 같은 취미로 만나는 사람, 동창회 친목회 향우회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 내 친구다.
그러나 작전 중의 전우가 아닌 이상 생명을 같이 할 수 는 없을지라도 어려울 때 서로 도울 수 있는, 아니 서로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되냐고 묻는다면 얼른 다섯 손가락을 다 꼽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중에 우선 내 초등학교 동창인 이종규라는 친구가 있다.
이름도 나와 비슷하지만 둘이 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똑같다.
그는 어린 시절 다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은 일제 때부터 우리고향에서는 제일 큰 양곡 보관창고와 도정업을 하셨던 대 사업가셨고, 내 선친은 법원에 근무하셨는데 두 분도 서로 절친한 사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에 월반하면서 동기생들이 자연이 멀어졌지만 이 친구만은 학년과 관계없이 우정이 더욱 깊어 갔다.
그러던 중 우리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일시에 가세가 기울었다.
부모님의 직업에서 받은 영향인지 그는 공대를, 나는 법대를 진학했지만 학비를 거의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부조리한 사회, 썩은 정치에 울분을 참지 못한 우리는 손수레에 마이크를 장치하여 끌고 다니며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외쳐댔으니 요즘말로 미화하자면 민주항쟁인 셈이다.
그 뒤로 나는 혈혈단신 상경, 취직하여 동료 여직원과 가정을 이루고, 공대출신인 그는 국내 직장을 마다하고 파독 광부의 길을 택하여 대구출신의 진실한 규수를 만나 독일에서 가정을 이루었다.
독일 남부 알브스타트(Albstadt)에 섬유공업이 한창 번창할 때 식당을 경영하여 부를 이루고, 또 태권도가 8단인 그는 시청 체육관을 빌려 독일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나라의 이름을 떨치는데도 한몫을 했으니 누가 일찍이 그의 맘속에 도사린 꿈을 짐작이나 했으랴.
내가 결혼 적령기에든 어렵던 시절, 나보다 먼저 결혼하여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친구신혼부부 방에 신세졌던 일이 두 번 있었는데, 내가 결혼하여 남의 협실에 살 때 한 방에서 같이 잔 건 이 친구뿐이다.
융프라우 구경을 마치고 인터라켄에서 딸네 식구들을 만나 염치불구하고 그 친구 집으로 찾아갔다. 커다란 지하실이 딸린 독일 전통가옥 3층에 마련해준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벽에 걸려있는 뒤러(Albrecht Duerrer;
1471~1528)의 ‘기도하는 손’ 조각품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젊은 시절 미술공부가 꿈이었던 뒤러는 학비가 없어 친구와 의논한 결과 친구가 먼저 돈을 벌어 대주고, 뒤러가 공부를 마치면 친구의 학비를 대주기로 약속을 했다. 뒤러는 미술공부를 마치고 친구의 일터로 찾아갔다. 그 때 친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오 하느님이시어! 저는 그동안 가혹한 노동으로 손마디가 굵어지고 굳어져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 친구 뒤러만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도와주소서······
뒤러는 연필을 꺼내 험한 친구의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진실한 한 친구의 힘이 알브레히트 뒤러란 세계적인 화가를 만들었고, 아름다운 우정이 불후의 명화 ‘기도하는 손’을 탄생시킨 것이다.
거기 머무는 이틀 동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의 고향인 칼브(Calw),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가 의류점을 하고 있는 생가와 기념관, 하이걸러(Haigerlocher)에서 제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을 연구했다는 비밀 지하 동굴, 그 외 여러 곳을 그의 안내로 둘러봤다.
바짓가랑이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는 왕자호동의 가슴도 찢어졌다더니 며칠만 더 쉬었다가라는 치레가 아닌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는 내 가슴도 아쉬웠다.
-여기서 뉘른베르크까지는 얼마나 되지?
-약 60킬로 쯤 될 거야 가보고 싶냐?
-아니 저 ‘기도하는 손’의 작가 뒤러의 고향이라서 물어본 거야!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 차에 올랐다.
25년전, 독일방문 때 체재비 모두를 부담해주던 일, 허약한 내 아내를 위해 필요한 약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 보내주던 정성, 이번에도 내가 소화가 잘 안되고 딸꾹질이 난다 했더니 인턴인 아들을 데리고 8시간을 달려 온 우정, 등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독일제 등산화를 선물이라며 사주던 자상한 배려, 물론 마음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돈이 있다 해서 다 하는 것이 아니란 것쯤 나도 알 나이다.
재산을 쌓기보다 모든 친구들에게 인간적인 정을 쌓아가는 벗, 그의 생이 정말 존경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