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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이인범 (李仁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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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78)
이인범 선생은 우리 가곡의 보급과 음악 문화를 대중 속에 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초창기 국내 음악계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선생은 말만의 음악가가 아니라 청중들의 가슴 속에 감동과 희열을 심어줌으로써 음악 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1914년 이학봉 목사의 장남으로 평북 용전에서 4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기독교의 가정이어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찬송가 등 서양음악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다른 사람보다 많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한 것은 숭실중학을 다닐 때부터였는데 이때 이미 그는 음악회마다 독창을 도맡아 해온 전문 성악가로서의 기초를 다듬고 있었다. 숭실을 졸업(28回, 1933卒)한 다음 그는 음악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당시는 남자가 들어갈 음악과가 있는 학교가 없어서 현제명 선생의 권유로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활발한 음악수업을 하였다. 연전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에 진학하던 중 1939년 11월 일본의 마이니찌신문사가 주최하는 전일본음악콩쿨에 참가, 성악부 수석으로 입상함으로써 당시 일본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1940년 도쿄군인회관에서 독창회를 개최하여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1941년 졸업한 후에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독창회를 가졌다.

그후 조국에 해방이 찾아오자 그는 오페라운동에 발벗고 나섰고 1950년에는 현제명의 <춘향전>에서 이도령 역을 맡아 열창하는가 하면 이어서 김대현의 <콩쥐팥쥐> 등 여러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53년 화재로 심한 화상을 입어 3년에 걸친 투병생활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56년 12월 명동의 국립극장에서는 부인의 반주로 재기 독창회를 가져 성공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1958년 11월 오페라 <토스카>의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그해 한국오페라단을 창설, 초대 대표로 취임하였다. 1959년 6월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주역, 11월 오페라 <카르멘>의 주역을 맡았으며, 1960년 4월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1960년 12월 오페라 <오델로>에서 주역을 맡았고 그해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장이 되었다. 1962년 2월 국립오페라단 초대 단장에 선출되었고 그해 11월 오페라 <돈 죠반니>에서 주역을 맡았다.
1963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장이 되었고 한국음악협회 이사가 되었다. 그해 3월 제3회 독창회와 지방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65년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제4회 독창회를 가졌고, 1966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장에 취임, 1973년 별세하기까지 봉직하였다.
그는 연세대 음대학장직을 맡고 있을 때도 성품이 온화해 큰소리 한 번 치지 않고도 모든 일을 순리대로 이끌어 나갔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흔히 음악가라고 자처하면서도 무대보다는 음악교육자로 안주하려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대를 통해 청중들과 대화를 나눴고 해방 후에 가진 독창회의 중요 프로그램을 한국 가곡으로 채움으로써 우리 가곡의 예술적 품격을 높임과 동시에 우리 가곡의 대중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현제명의 ‘산들바람’과 ‘희망의 나라로’를 레코드에 취입한 이후부터 소위 가곡 붐이 일기 시작했지만 이처럼 외적 화려함 뒤에는 남다른 실의를 딛고 일어서는 눈물겨운 투쟁도 있었다. 다행히 목소리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중화상을 입은 얼굴은 성악가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는데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행동했으며 오직 음악 예술 속에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한평생을 살아갔다.

서울시 문화상(음악부문)을 수상했고 1973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이 수여되기도 했지만 결국 1973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독창회가 1970년에 있었을 때 피아노 반주자는 부인 이정자로부터 딸 이방숙으로 넘어와 또 한 번의 감격의 무대가 되었거니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된 1993년에는 문화방송국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 딸 이방숙이 대신 받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재직중인 이방숙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대 학장직을 맡음으로써 아버지와 딸 2대에 걸쳐 학장직을 맡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성악가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불굴의 정신력을 통해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테너 이인범 선생의 삶은 뒤를 잇고 있는 후학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숭실100년사에서 인용.편집/내마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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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여 고이 잠드소서(나운영)

- 고 이인범 교수의 영전에-

우리나라의 명 테너요, 음악계의 거성인 이인범 선생은 이제 가시고 말았다. 이제부터 다시는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가을의 적막감을 더욱 느끼게 하는구나.
선생께서는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에 이유선, 김성태, 김생려, 정희석 제씨와 함께 현재명박사의 지도아래 자라나 마침내 1939년 [전 일본음악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일본사람들을 물리치고 당당 수석으로 입상했으니 그의 실력은 이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선생은 참으로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니 선생이 1941년 일본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1942년부터 현제명박사가 주재하던 [경성후생 실내악단]의 주동멤버가 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만주까지 순회하면서 '가고파', '내 마음', '희망의 나라로', '고향 생각'. '산들바람'등 우리 가곡과 수 많은 이태리 오페라의 아리아를 불렀을 때 선생의 인기는 김천애 씨와 함께 절정에 달했었으니 이제 선생이 떠나신 지금 메어지는 가슴은 더욱 아플 뿐---.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6.25사변 중에는 김생려, 김천애씨와 함께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여전히 연주활동을 하시다가 1953년 얼굴에 불의의 중화상을 입어 선생의 치명상에 대해 동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때 선생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1956년에 [재기 독창회]를 가져 팬들의 기도와 성원에 보답했었으니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랴? 뿐만 아니라 1960년부터 모교인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수 차례의 독창회와 오페라 주연, 레코드 취입등 눈부신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야말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수명이 긴 연주가이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년 전부터 건강을 해쳐 오로지 음악대학 학장으로서 대학 오페라 운동에만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라 트라비아타'와 특히 우리나라 초연인 모차르트 작곡 '마적'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불행하게도 '마적' 초연의 날에는 참석조차 못하시고 병원 침대에서 병마와 싸우게 되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돌아보건대 연세음악은 이 해로 55주년을 맞이하게 되며 1918년 김영환선생이 음악과 없는 음악부 교수로 취임했고, 1928년에 현제명박사가 이어받은 이후 박태준박사의 바톤을 다시 선생이 이어받아서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니 선생의 공로와 업적은 이 하나만으로도 높이 찬양받을 만한 일이 어찌 아니랴?
다만 음악대학 신축에 대한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시고 영면하셨으니 이 정신적 고민이 그의 건강을 더욱 해쳤던 것이나 아닐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성악가, 우리 음악계의 또 하나의 별을 우리는 잃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성경 말씀대로 후학들은 선생이 남기고 가신 뜻을 받들어 나아갈 것이니 선생이여 고이 잠드소서

<1973. 9. 17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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