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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오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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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클래식아티스트(1992).세광피아노지<편집/내 마음의 노래>

매혹적인 저음과 황혼기에 접어든 노래 인생의 농익은 감성으로 우리의 가곡발전에 새롭게 뛰어든 저음의 시인.
만주땅에서 태어나 격동의 세월을 흘러오며 노래가 좋아 노래로 한 세상 살다 가니 노래 나그네로 불러 달라는 노익장. 그가 걸어온 여정과 다시 부르는 노래의 감동. 국민학교 담장 너머로 목련과 개나리가 시샘하듯 고개를 내미는 동부이촌동 골목길에 바리톤 오현명씨가 20년 이상 살아 온 '동인 아파트'가 있다. 전화를 통해 들리던 굵직하고 매혹적인 저음은 이곳이 뉴욕의 '할렘'과 닮아 있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1층이 상가인 건물을 찾으라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칠 뻔한 낡은 5층짜리 건물 한 동이 번듯한 고층 아파트군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러나 정작 현관을 들어서면 오래된 집의 아늑한 정취가 그가 직접 꾸민 각종 장식물들과 서재에 가득 꽂힌 책, 신문 스크랩북들과 함께 향긋하다. 최근에 새로 구입한 듯한 디지털 피아노 뒤편의 유리창에는 그가 시장에서 사다 붙여 놓았다는 색셀로판지들이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우아하다. '가곡의 대부'요 '저음의 시인'이며 '영혼의 노래'를 부르는 노성악가의 서재라는 선입견이 불러일으킨 감흥 탓일까. 

 "나는 연주회를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외부의 요청에 의해 애창곡들을 부르는 무대이고 또 하나는 그야말로 음악가의 양심이랄까, 신념 같은 것을 보여주는 연구발표의 무대입니다. 삼사백 년이 넘는 서양의 가곡 역사에 비하면 홍난파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예술가곡사는 이제 겨우 70여 년 남짓의 짧은 연륜입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가곡도 누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사장될 수밖에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곡도 누가 자구 악보 속에만 갇혀 있는 곡들을 연구하고 발표해야만 널리 알려지리라는 건 당연한 이치지요. 이것이야말로 나의 남은 노래인생에 바쳐야 할 과업이라는 생각입니다. "
100kg이 넘는 육중한 몸에서 넉넉하게 울려나오는 그의 가곡에 관한 생각이다.

단전호흡으로 노래하는 습성이 말할 때도 그대로 연결되어 얘기할 때마다 아랫배가 움직인다. 이렇게 이어지는 그의 말소리는 그래서 흡사 성우가 읊는 대사같기도 하고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강의하는 것 같은 위엄도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얼굴의 잔주름과 40대부터 검은색이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완벽한 은발이 된 머리칼은 인생의 거울 앞에 선 노년의 푸근한 깊이로 다가온다.
그가 국내 처음으로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가졌던 63년쯤만 해도 성악가들의 발표회 때 가곡을 부르면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처럼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외국의 성악곡들은 부점 하나, 자음, 모음에까지 철저히 신경을 쓰지만 우리 가곡은 대충 부르는 사람 요량에 맡기는 현실인데 하물며 60년대 초반에 그것도 이렇게 얕잡아 보는 가곡으로만 독창회를 꾸렸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곡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63년에 그는 서른 아홉의 중년이었다.

그가 이렇게 가곡과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기까지의 살아온 세상은 격동으로 흔들리는 세월이었다.
오현명은 1924년 만주 봉천과 이웃해 있는 撫順(무순)에서 태어나 20년 이상을 살았다. 꽃 같고 황금 같은 젊음이 배어 잇는 고향이 바로 중국대륙이었다. 그의 여유있는 품성은 이 황토대륙에서 보낸 유년과 청년기의 정서에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만주에서 정미업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형님의 영향으로 일찍이 음악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가끔 서울에 다녀오면서 형님이 사 오는 현제명의 '니나''푸른 잔디''푸르러'등의 곡이 담긴 유성기판을 들으면서 가곡에 푹 빠져들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도 몇 번 뽑혀 나가 노래를 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는 만주의 한 교회에서 임원식 씨의 반주로 찬송가를 부르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음악공부를 하려면 다들 일본으로 가는 수밖에 없엇는데 8형제 중의 막내였던데다가 5형제가 전부 집을 나가고 없어 부모님이 잡는 바람에 그는 열아홉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끌려나가기까지 2년동안 집안의 장사를 거들며 주저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이 기간은 결코 허송의 세월만은 아니었다.
당시 봉천에서 신문을 보니 조선합창단 단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국민학교 동기이자 후일 '보리밭'의 작곡자로 널리 알려진 윤용하가 단장, 지휘자, 작곡자, 편곡자등을 도맡고 있었다.
반갑기 그지없었던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합창도 하고 발표회도 하면서 청춘을 살랐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44년 겨울 오현명은 결국 일본군으로 끌려나가면서 봉천땅을 영원히 뜨게 되었다. 45년 9월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가족이 있는 봉천으로 되돌아가려고 부산까지 왔다가 3.8선이 막혀 못 올라간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군복을 그대로 입은채 서울력 앞 귀환동포 텐트들 속의 자리 하나를 비집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신문광고가 있었다. 현제명 선생이 한국 최초로 고려교향악단을 만들어 이사장이 되고 고려합창단도 만들 계획인데 단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길로 남산에 찾아가 시험을 치긴 쳤는데 재정 사정으로 합창단 설립계획은 최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제명 선생이 불러 찾아가 보니 또박또박 고딕체로 쓴 거의 이력서를 보며 교향악단 서무로 일해볼 것을 권유했다. 그로서는 잘 곳과 먹을 것 그리고 월급까지 일거에 해결하게 된 계기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동경하던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과 같이 어울리며 노래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듬해인 46년에는 새로 설립된 지금의 서울대 음대 전신인 경성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향학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6.25가 터지고 그는 다시 인민군으로 끌려 갔다가 춘천에서 도망친 후 북진하는 육군을 달 위문대로 평양까지 가고, 1.4후퇴때는 공군 위문단으로 대구까지 밀려오고, 다시 해군으로 편입되어 부산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해군 현역(정훈 음악대)으로 제대를 한다. 그래서 3개국의 군대를 체험해야만 했던 그는 가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 후 민간인으로 전역할 때 했다는 "저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이 땅에 없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자신에게 빗대어 우스개처럼 말하기도 한다. 만주에서 나고 자랄 때오 늘 중일전쟁 등의 싸움을 주변에서 끼고 살아야만 했던 격동의 세월은 오현명에게 조국과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포들의 정서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든 촉매였을까.그래서 가곡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게 된 것일까.
"굳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노래가 좋았고 그 좋은 노래를 통해 우리의 정서를 공유해 왔다는 것 뿐이지요. 그렇지만 그 슬프고 험한 세월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연주자이기 이전에 필부의 당연한 소망일 겁니다. "

그에게 64년은 세속적으로 '출세운'이 열린 중요한 해였다. 선린상고, 경남여중, 서울예고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한양대에 교수로 입성한 해였고 국립오페라단의 단장으로 선출된 연도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임명제로 바뀌었지만 그 해부터 82년까지 매해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단장으로 자리를 지키며 가곡 못지않게 오페라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 오페라에 대해선 안타까운 심정을 가진 회의론자가 돼 버렸다.
"나도 한때는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 때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오페라에 접근해서는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소재 자체가 거의 서양것인데 구름 위에서 노는 것 같은 귀족들의 풍속 등을 그들의 언어로 제대로 재현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외국에 나가서 오페라를 보면 금방 느껴집니다. 그끔 동양사람도 뽑혀서 그들과 함께 출연하는데 연기하는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 표정이 없고 서 있는 것과 주위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들이 뭔가 어색한 사람을 보면 그는 틀림없이 동양사람입니다. 우리 소재로 우리 오페라를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이 한국 오페라가 살아 남는 길인데 지금까지 거액을 들여 만들어진 창작 오페라들은 거의 한 번 공연한 뒤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외국의 주옥 같은 '춘희'나 '카르멘'같은 작품들도 처음에는 외면당했지만 수백 년 세월 동안 씻겨져 내려오면서 오늘의 후광이 입혀진 것 아닙니까?"

그가 우리 가곡에 심혈을 기울여 온 것도 이런 시각과 연계돼 있는 것 같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만도 평생을 갈고 닦을 만한 매력이 느껴지는 곡이지만 그네들의 발음과 정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피셔 디스카우 이상은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솔직한 평가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 가곡을 만만하게 대할 수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흔히 많은 성악가들이 빠져 있는 오류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우리 대중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외국 가곡을 부를 때보다 곱절의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금방 표가 난다.
실제로 우리는 외국발음에 익숙해진 성악가들의 한국말인지 외국말인지 분간이 안 가게 묘하게 부르는 가곡을 들으며 가사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아쉬워 한 경험이 많은 게 현실이다.
슈베르트 가곡의 원산지는 독일이지만 이제는 이미 독일 노래라는 이미지보다는 전세계인의 노래가 돼 버렸듯이 우리 가곡도 연륜이 더해지면 이처럼 세계성을 획득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러나 그 해답은 정작 우리 자신들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 오현명씨의 생각인 듯하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일본인 성악가들이 한국 가곡 연주회를 가진다는 소식과 함께 연주자로 초청된 일본인 교수가 소속 학교에서 한국 가곡을 부르는 무대에 나가는 걸 반대해 차질을 빚고 있다는 기사가 지상에 실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이런 류의 발표무대는 벌써 10회째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한국 가곡의 씨앗을 발아시키고 있는 도다 유키코라는 여류 성악가는 한국에서 오현명씨에게 3년 동안 사사받고 돌아간 사람이다.
오타운 사제간의 정으로 끊임없이 편지가 오가며 연 전에는 스승이 일본에 초청되어 제자와 같은 무대에 서기도 했다. 40이 넘은 노처녀 도다의 노력 덕분에 늘어가는 일본의 가곡 연주자들은 연주회 때는 다들 한복을 입고 나와 열창을 한다고 한다. 신념을 가지고 깊이 파들어가는 우물에는 반드시 달콤한 생사가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오현명씨가 파들어가야 할 우물은 아직도 깊고 넓다. 기악을 하는 음악인들과는 달리 몸이 악기인 성악가에게는 나이 제한이 있어 그 는 요즘 초조하다. 다행히 다른 이들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고 격려해 주고 본인이 생각해도 감정이 원숙해지고 아직 힘도 그리 달리지 않아 부지런히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에 치른 스타일의 연구발표 무대를 가능하다면 1년에 1~2번 계속 가질 계획이다.


"무대에서 노래를 뜻대로 조율하는 순간에는 세상 어느 행복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과 황홀이 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만 뜻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또래의 동료들 중에는 과거에 어떤 직책에 있었네, 그 시절에는 참으로 화려했었네 하며 내일 모레 황천 갈 사람들처럼 과거에의 미련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은 흘렀고 흐르고 있고 육신은 낡아가는데 과거에의 미련만으로 아까운 생을 소진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요. "
그가 이처럼 미련에 발목 잡히지 않고 휘적휘적 활달하게 걸어가는 삶의 자세는 평소 주면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악가'대신 '노래 나그네'로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다분히 낭만적인 심성을에서도 엿보인다.
노래가 좋아 노래로 한세상 살다간다는 군더더기 없는 진솔함이 있다.
예전에는 성악하는 사람들이 가슴을 쥐어짜며 노래하는 잘못된 호흡법과 무절제한 자기 관리 때문에 폐병으로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앗지만 요즘은 오히려 장수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노래 나그네 오현명은 성량 좋은 너털웃음을 웃는다. 서재의 색유리를 통해 중천에 떳던 해가 서쪽으로 고개 숙이며 뿌리는 빛이 노성악가의 은발에 부딪혀 그 웃음처럼 눈부시다.



******* 인터뷰자료-*- 나의 데뷔시절 **********
세광피아노지 1992.6

교직에서 정년퇴임을 하고도 벌써 4년이 흐른 지금 내 젊었던 시절의 일들을 생각하자니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던다.
그날 이후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노래하며 가르치며 살아오느라 특별히 생각해본 적도, 잊어본 적도 없었던 데뷔무대.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는 '옛이야기'를 한번 떠올려 보는 것도 내겐 나름대로의 흥미를 자아낸다.

서울음대를 졸업하던 1948년, 그러니까 이 시기를 전후하여 '처음'이라는 단어가 붙는 무대가 시작된다고 부면 될 것이다. 다음 해인 1949년 2월, 작고한 소프라노 정영식 씨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2인 음악회>를 개최함으로써 음악계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의 명동 미도파 백화점 자리였다고 기억되는 미국 공보원이 당시의 공연장이었는데, 슈베르트와 슈만의 곡들을 주요 내용으로 한 그날의 공연은 3백여 객석이 거의 찼으므로 성공적이었다는 표현을 써도 좋으리라. 나름대로  연습도 많이 한 터라 자신만만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묘한 흥분이 일어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흥분이 공연이 끝날 때까지 미처 가라앉지 않은 탓인지 결국은 마지막으로 부른 듀엣곡인<춘희>중의 '이말을 전해주'라는 아리아를 부를 때는 목이 떨려서 무척이나 당황을 했었다. 아쉬움속에서 음악회는 막을 내렸지만 여러가지로 어려운 조건속에서 애써 치러진 무대였다.

당시는 6.25가 일어나기 2년전이니까 정치적으로는 죄우익의 사상적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한 상태였고, 경제적으로도 두말할 나위없이 힘든 때였으니까 말이다. 함께 공연한 정영식씨의 스승인 박은용 선생은 이른바 '좌익'세력에 속한 인물로 쫓기는 입장인지라 제자의 이날 발표회장에는 와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음악회가 끝나고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 자리-지금 같은 리셥션의 의미를 지닌-에 나타나서 격려와 칭찬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그때 일어났다. 갑자기 다방안으로 형사들이 들이닥쳐 박선생을 체포해간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그때의 사회상은 혼란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한국 오페라사의 시작을 알렸던 첫 공연에서 맡은 배역은 단 한마디의 대사가 주어진 도메스티코라는 집사 역이었다. 결코 주요 배역은 아니었지만 오페라 공연에서 이러한 역할이 장면의 전환과 진행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인식을 하기엔 다들 경험이 너무 없었다. 모두 무심하게 있다가 마지막 순간 집사의 역이 비어있음을 알고 당황하던 차에 누군가가 합창단원이었던 나를 추천했던 모양이다. 물론 신인이었던 나는 큰 행운으로 여겼고 쾌히 받아들였다.
<춘희>의 2막 2장은 매우 빠른 스피드로 진행이 된다.
그런 상황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들면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 때 내가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서 외쳐야 했던 한마디는 바로 "저녁~준비~됐소!"라는 대사였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을 하게 되고 장면이 전환될 수 있었든 것이다. 단 한마디의 대사가 있는 배역이었지만 나는 손에 타올도 두르고 지팡이도 하나 구해서 그럴싸하게 바닥을 쿵쿵치며 "저녁~준비~됐소!"를 외칠 만반의 준비를 갖췄었다. 그러나 앞서 말햇듯이 굉장히 빠른 스피드로 진행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타이밍에 맞게 재빨리 문을 열고 외치기사 쉽지는 않았다.따라서 대사가 잘 맞아 떨어지는 날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됐지만 맞아 떨어지지 않는 날은 모든 것을 망친 기분이 되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습지만 대사 한마디 했던 그 작품이 난 무엇보다 애착이 가고 기억에 남는다.
나만의 독창회는 53년도에 이르러서야 갖게 된다. 당시 경남여중 음악교사로 근무중이던 나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있던 시절이었지만 남성여고 강당에 어렵사리 무대를 꾸밀 수가 있었다.
잦은 정전으로 인해 수많은 촛불을 켜고 슈만의 <시인의 사랑>, 베르디의 <돈 카를로>중의 '나홀로 잠들리', 
베르디의 <레퀴엠>, 김순애의 <해당> 등의 노래를 불렀던 그 모습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비록 어려운 시대였지만 더욱 낭만이 있었고 의욕이 넘쳐 흘렀던 것 같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요즘의 젊은 성악도들의 무대를 접할 기회가 되면 늘 느끼는 것.
물론 성악도에겐 첫째도 소리, 둘째, 셋째도 소리지만 '내가 이 발표회를 안 하면 못견디겠다.' 라는 식의 끓어오르는 의욕은 곧바로 음악성과와도 연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마치 의례적인 행사를 치르듯 귀국독창회를 갖는 젊은 성악도들의 노래에 풍부한 표정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더불어 한국적인 오페라의 개발 노력도 앞으로 이들의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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