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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金東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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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2009.7.31)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분명 인간의 생애는 짧다. 이를 무한한 시간의 선상에 놓고 비교한다면 더더욱 짧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허무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김동진, 그는 회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보는 글 중에 <60년이란 짧지 않은 긴 세월이 이렇게 한 가닥 섬광처럼 스치고 마는 것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회고하고 다시 <음악과 더불어 생활해오는 동안, 영원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고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그리운 추억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괴롭고 안타까운 또 다른 추억들이 뇌리에 교차>되는 혼돈과 아픔을 억누를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예술가로서의 한 평생,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온 마라톤 선수와 같이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작품을 완성하고 이에 감격하는 예술가만의 특유의 희열이 있는 반면, 이를 위해 스스로 싸워가야 할 자신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의 반복과 인내가 요구되기도 한다. 또한 자기가 속한 당대의 사회와 제도가 주는 영향력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도 특히 예술가들에겐 매우 중요한 여건이 되는 것이다.

김동진은 1913년 3월 22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목사가 된 조부의 영향으로 그의 부친 김화식도 신학공부를 하여 목사가 되었다. 개신교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무렵 그의 집안이 이처럼 깊은 신앙의 경지에 있었던 것이 김동진이 성장하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한다. 그는 부친이 신교의 목사인 덕분으로 이미 취학하기 전부터 살아있는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이 철저한 목사의 가정에서 종교적인 엄격함과 함께 음악적인 재능을 서양음악으로 키워나갈 수 있었으며 또한 이 방면의 흥미를 천부의 소질로 깊이 파고 들어간 것이다.

그는 최초의 음악적 체험을 교회 안의 풍금 소리에서 기억해 낸다. 그 풍금 소리는 마치 기독교인이면 하나님의 음성을 체험해보고 그 신성(神性)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맛보듯, 전율하리만큼 숙명적으로 음악의 마성(魔性)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는 5, 6세때에 이미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소질을 깨달았다. 이것은 그가 <음악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아무래도 나의 부친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의 풍금일 것이다. 나는 자주 풍금을 장난 삼아 내가 배운 노래를 짚어보면서 음의 신비로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었다고 회고하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김동진은 1927년 안주 유신 소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3학년 때 미국인 선교사 말스베리 (Dwight R. Malsbary)를 학교에서 스승으로 만났는데 그가 말스베리를 만나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은 것은 좀 늦은 감이 있었으나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계기를 <최초이며 영원한 은사로 모시게 된 말스베리 선생을 뵙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무렵 김동진에게는 문학적 재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대문학으로 많은 시집, 소설집을 대할 수가 있었다. 그중 김동환(金東煥)의 「봄이 오면」, 주요한(朱耀翰)의 「부끄러움」, 이광수(李光洙)의 「외붓 한자루」등의 「3인 시가집(三人詩歌集)」을 애송하고 있었으며 이를 작곡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이것은 중학교 5학년 때 즉 졸업할 때의 일이다. 우선 '봄이 오면'을 작곡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고 술회한다.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학교 음악실에 가서 혼자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난 다음 풍금을 치면서 발성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 속에 종종 암송해오던 '봄이 오면'의 한 소절인 <건너 마을 젊은 처자>의 악상이 떠오르면 황급히 나의 손가락은 풍금 건반을 짚어가고 있었다. 선율이 떠오른 것이다. 즉시 5선지에 그 선율을 옮겨 놓았다. 반복해서 풍금 소리에 맞춰 불러보았다. 감히 내가 작곡한 것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는 황홀경에 빠져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 후 '봄이 오면'의 가사에 곡이 모두 작곡된 후 나는 기숙사의 한 방에서 기거하던 학우 '장대욱(張大郁)군에게 처음 이 곡을 들려주고 배워주었다. 같이 부르기도 했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온 기숙사에 퍼졌다. 이웃 숭실전문학교의 기숙사에까지 알려져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나아가서 학생들이 나가는 교회의 학생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애창되었다.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큰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 때부터 작곡에 대한 집념과 자신감이 더욱 강렬해졌다. 잠시 머무는 생각이 아니라 영원히 치달리고 싶은 각오와 맹서처럼 의욕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그가 예술적인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고 보는 '봄이 오면'은 그를 작곡가로서 대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가 한 줄의 시가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면 나머지 아홉줄의 시는 시인의 노력과 집중에 의해 쓰여졌다는 이야기처럼 김동진에게도 항상 작곡에의 집념과 열성이 어느 날 밤 홀연히 그에게 영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그가 창조적인 욕구에 얼마만큼 적극적인 열성을 가졌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음악적인 재질과 그 재질을 계발해 나아가는 품성이 오늘에 와서 '작곡가 김동진'을 만인이 우러러 보는 높은 산봉우리처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고서도 계속 말스베리 선생의 지도를 받아가며 작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이은상의 시 「가고파」를 비롯 「발자욱」「당달구」,「뱃노래」등의 가곡을 작곡했다. 뒤에 불세지공(不世之功)의 명성을 얻게된 「가고파」는 말스베리 선생으로부터 김동진이 작곡가로서의 천재성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일본에 유학하여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김창덕(金昌德) 목사(부친의 친구)의 종용으로 만주의 신경(新京)에 가서 신경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입단했으며 곧 작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계기까지 생겼다.

이 시기에 가곡 「내마음」과 「수선화」도 작곡했는데 이 두 곡을 작곡할 때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수선화」는 낭만적인 성격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거의 즉흥적이리만큼 건반을 쳐보면서 작곡되었다. 또 「내마음」은 시가 좋아 늘 애송하며 작곡할 것을 시도했다. 그래서 신경의 유명한 호수인 남호(南湖)에 찾아가 악상을 얻으려 애썼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돌연 악상이 샘솟듯 떠올랐다. <내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에 대한 선율이 떠오른 것이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잊어버릴세라 사무실에 도착하는 길로 오선지에 기록했다."

「내마음」이 완성된 직후 바리톤 성악가 이인범(李仁範)(본교 동문 1933년 졸업, 김생려(金生麗) 씨 등으로 구성된 후생악단(厚生樂團)이 신경에 와서 순회 음악회를 열었다 이 때 이인범이 「내마음」의 초고 1부를 복사해 갔다.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곡을 이인범이 한국에 가서 불러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해방이 된 그 해에 국립 교향악단 및 합창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약했다. 작곡가로서의 활약도 괄목하리만큼 성장했다.

1953년은 김동진의 음악가로서의 생애가 무르익기 시작한 해이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 예술대학의  음악과 교수로 부임했다. 이 때 소월시에 작곡한 「진달래꽃」,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길」,「초혼」,「못잊어」등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1964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곡, 지휘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1974년 경희대학교 개교기념 칸타타 「대학송가」에 있는 「목련화」도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곡이다.

필생의 작품이랄 수 있는 가극 「심청전」은 그가 작곡을 시작한지 40년만에 개작을 완료했다. 1978년 4월 24,25일 양일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공연으로 두 차례 초연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한국적인 양악(洋樂)을 창작하는데 몰두, 드디어 신창악(新唱樂)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국악과 접목시킨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1979년 그는 신창악 연구회를 조직하여 그 보급에 힘을 썼다.  그는 <신창악은 창(唱)이면서도 창이 아니게, 창아아니면서도 창이 되게 노래하여 판소리의 정신과 특징을 바탕으로 한>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우리의 전통음악과 서양 음악을 접목시킨 것이다. 우리 민족의 특유한 음악을 창조해 낸 것이다. 1991년 가극 「심청전」과 「춘향전」에서 가려 뽑아 「신창악연주회(新唱樂演奏會)」를 갖기도 했다. 그의 신창악은 1993년 가극 <춘향전>을 통해 두 번째의 결실을 보았다. 1998년 11월 3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모교인 숭실학원(崇實學園) 창립 100주년기념, 「관현악과 남성합창을 위한 교성곡」을 작곡한 것도 인상에 남는 일에 속한다

김동진의 음악가로서의 생애는 평탄하지 못했던 우리의 민족사와 함께 많은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즉 예능 교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당시, 부친이 신교목사로 시무하는 덕분에 음악적 재질을 일찍 발굴하게 되는 과정에서 말스베리 선생과의 만남이나, 일본 유학 등이 모두 아슬아슬한 고비처럼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그의 음악교육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일들을 "하나님이 주신 행운"이라고 표현한다.
「내마음」에서 「가고파」, 「목련화」 등에 이르는 가곡과 「심청전」, 「춘향전」 등의 가극에 이르는 우리나라 악단에 남긴 업적은 지금 당장의 성과만으로 평가할 성질은 아니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위업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음악사의 굵은 획으로 남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재 김동진은 구순을 넘긴 나이지만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늘 음악계의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전문 음악가로서 철저한 장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부인 이보림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약력-
1943년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서곡 <양산가(陽山歌)> 및 성시곡 <제례악(祭禮樂)> 작곡/지휘
1952년 한국초연, <심청전>중 <범파중류(泛波中流)> 인당수 뱃노래 작곡/지휘
1954년 6·25기념 칸타타 <조국찬가> 작곡/지휘
1957년 관현악 <동양적 조곡> 작곡/지휘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기념 칸타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작곡/지휘
1961년 칸타타 <조국>(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국재건) 작곡/지휘
1969년 경희대학교 창립20주년기념 칸타타, 조병화 작시 <대학찬가> 작곡/지휘
1974년 칸타타 <대학송가>(조영식 작/시) 작곡/지휘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가극 <심청전> 공연
1997년 일본궁 색동어린이합창단 연주/지휘
1997년 가극 <춘향전> 초연
1998년 칸타타 <하나가 되라>(조영식 작/시) 작곡
 
-상훈-
1962년 부일영화음악상
1967년 서울시문화상
1970년 부일영화음악상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4년 3·1문화상
19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2000년 은관문화훈장
 
-주요작품-
* 관현악곡
<만가>(1942) <제례악>(1943) <양산가>(1943) <동양적 조곡>(1957) <가야금 협주>(1958) <가야금 협주곡>(1959)

* 성악곡
<봄이 오면>(1931) <발자국> <당달구> <뱃노래>(1932) <가고파>(1933) <파초>(1934) <내마음>(1940) <수선화>(1941) <신아리랑>(1942) <부끄러움> <신밀양아리랑>(1946) <오월의 순풍> <섬색시>(1947) <내조국> <샘가에서> <낙동강>(1951) <칠월의 노래>(1952) <낙동강> <조국찬가> <명태> <농부가> <솔멧골> <나들이> <낯선 마을에서> <추석>(1954) <풍년가> <바다로 가자> <농민의 노래>(1955) <닐릴리야> <길>(1956) <님의 노래> <진달래꽃>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못잊어> <초혼>(1957) <창문을 열면> <떡타령> <돌아가자 내고향으로>(1958) <그리움>(1959) <저구름 흘러가는 곳>(1960) <너는>(1961) <동해바다>(1962) <밤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1963) <그 강물 다시 흐르리>(1964) <충무공의 노래> <충무공>(1966) <앞을 보고 살아가자>(1967) <잘살기 노래> <탄금대> <한산섬> <봄은 개나리> <청춘의 기를 세워라>(1968) <사월의 왈츠> <자장가>(1970) <망향가>(1971) <가고파(후편)>(1973) <목련화> <봄의 왈츠> <우리 강산>(1974) <베들레헴의 종>(1977) <평화의 노래>(1982) <민들레꽃>(1984) <도봉> <새로운 계절> <망향가> <평양경계가>(1985) <소리>(1987) <사철가> <긴농부가> <자진농부가>(1988) <백두산>(1990) <하나가 되라>(199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993) <남산이여 영원하라> <겨울의 아침> <서소문 길섭 눈물다리> <달아달아 밝은달아> <통일이여 어서오라>(1994) <한강>(1998) <금강산 찬가> <땅끝해송>(2001)

* 가극
<심청전(초연)>(1978) <춘향전>(1993)

* 칸타타
<조국찬가>(1955) <승리의 길>(1958) <조국> <민족의 축원>(1967) <대학 찬가>(1969) <민족의 행진>(1971) <대학송가>(1974)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4) <세계 속의 새 한국 ‘내 조국에 영광있으라’>(1996) <문화세계 창조 ‘세계 속의 새 한국’>(1998)
 
-작품집-
<내마음>(1973) <목련화 판소리채보 출간>(1978) <춘향전 범파중류(泛波中流)> <한국정신음악 신창악곡집>(1986) <가극 심청전>(1989) <가극 춘향전>(1992) <교성곡>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5) 
 
-저서-
<판소리 채보 춘향전>, 김동진, 주류, 1985
자전에세이 <가고파>, 김동진, 성광사, 1988
아시아음악학총서3 <한국정신음악 신창악>, 김동진, 2001
 
-음반-
<한국정신음악 신창악집>(1986) 

참조문헌 : 김동진 자전에세이 '가고파', 대한민국예술원사이트 / 내마음의 노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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