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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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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있는 음악을 향한 확연한 몸짓. 객석(1998.11) -

작곡가 이건용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인상이 두 가지가 있다. '객석'은 지난 여름 14인의 국악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국 음악사를 움직인 작품 베스트 10'을 선정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1위부터 10위까지 등위를 매겨 10개의 작품을 추천받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비록 순위에 들지 못했지만 의외의 곡이 여러 전문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건용의 '만수산 드렁칡'이 순위권에 근접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기수의 '세우영'이나 황병기의 '숲'과 마찬가지로 이건용의 '만수산 드렁칡'이 한국 창작 음악사에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작품으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잘 아는 평론가에게 이건용에 관한 이야기를 또 듣게 되었다. 그 평론가는 이건용을 통해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건용은 '한국 사람이 문학을 하면 한국문학이 되는데, 음악의 경우 한국 사람이 음악을 한다고 해서 한국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음악이 되는 현실이 무척 혼란스럽다'는 말을 하며 '나는 서양음악이 요구하는 최고의 코스를 밟아온 작곡가로서 서양음악의 괴수가 아닐까'라며 자신의 불편한 현실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우리 음악이 처해진 현실이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발레 음악 '바리'로 한창 주목받고 있는 작곡가 이건용. 그와 인터뷰에 앞서 촬영을 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덕수궁 옆 성공회 건물이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화려한 장식없이 단순하지만 안정되고 육중해 보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공회 건물 앞에 그를 세워놓고 보니 그의 '외유내강형'의 인상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어느새 희끗한 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그는 얼핏 편안하고 친근감 있어 보이지만, 그의 힘있고 논리적인 어조에서 그 어떤 것에도 결코 '부서지지 않을' 단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건용은 벌써 20년 가까이 이 성공회에 다니고 있었다(그는 현재 이 성공회 성가대의 지휘를 맡고 있다). 그가 독일 유학을 막 끝내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부터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종교음악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에게 종교적 배경이 작품 활동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서양의 관습화된 교회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에 맞는 고유의 교회음악을 만드는 일은 내 작품 활동에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간 우리의 교회음악은 우리 고유의 노래관습이나 음악관습을 잃고 남의 노래관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온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거지요. 교회음악의 문제에서도 한국화는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그가 작곡한 종교적인 작품들로는 합창곡 '출애굽', 칸타타 '분노의 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등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작품 속에는 종교음악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현실인식이 곳곳에 드러나 있기도 하다.
'한국적' 교회음악을 추구하는 작곡가. 이 말은 곧 이건용의 일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모든 음악은 결국 '한국적' 혹은 '민족적'이라는 수식어와는 결코 뗄래야 뗄 수 없으니까. 최근에 완성해낸 발레 음악 '바리'도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바리'는 국립발레단이 11월 6일부터 8일까지 선보일 대형 창작 발레이다. 공주로 태어났으면서도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바리공주'가 오히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약령수를 구해온다는 무속설화를 모던 발레로 부활시킨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였다. 그러나 한국적인 내용에 서양의 발레를 결합한 이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곡 구상과 스케치만 하는 데도 4개월이 걸렸을 정도다.
"무속설화에 바탕을 둔 한국적인 창작 발레이기 때문에 서양적인 발레 조건만을 충족시켜서도 안되고 또 너무 현대적이어서도 안되죠. 그리고 한국적인 것만을 부각시켜서도 안되고…. 그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작품을 만드는 일이 무척 어려웠어요. 그간 터득한 음악적 기술과 지식을 1시간 25분 가량의 작품에 모두 담아낸 느낌입니다."
이건용은 이 작품을 작곡하기 위해 한동안 무용음악의 거장인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의 곡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클래식 발레에 나름의 민족적인 색깔을 훌륭하게 살려낸 이들의 작품을 통해 그의 음악이 나아갈 방법을 모색할 수 있었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 소설에 탐닉하다

이건용이 처음 음악을 좋아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성악을 공부하다 목사가 된 아버지로 인해 그는 일찍부터 음악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가정 예배를 보면서 저절로 음을 터득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자신이 작곡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 스스로 작곡 노트를 만들어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 당시 누군가가 작곡 이야기를 꺼내면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음악가는 작곡가만 있는 줄 알았던 나는 온통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몰두해 있었지요."
그가 슈베르트를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슈베르트 100곡집을 사다주었는데, 이때 듣게 된 슈베르트의 노래들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슈베르트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나마 슈베르트와 같은 곡을 쓰고 싶었다. 그후 이건용은 '레슨 한 번 받지 않고'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에 들어가 정식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다 20대 초반에 잠시 외도를 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끊임없이 '나'를 찾기 위한 방황을 해야만 했으며, 음악은 그런 그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승옥의 소설을 보고 비로소 그와 똑같은 상황에 빠진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건용은 그 뒤 소설을 쓰면서 그의 심리나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67년 소설 '석기시대'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오늘날 '특유의 생각과 느낌을 소리에 담아낼 줄 아는 작곡가'로 정평이 난 것도 이때의 경험이 큰 힘이 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음악'으로 되돌아온 그는 1976년 국비 장학금을 받고 독일로 건너갔다. 프랑크푸르트 음대에 적을 두고 폭넓게 작곡을 배웠다. 그가 독일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무엇보다 독일인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던 점이었다고 한다.
"이치에 맞는 사고를 하는 습관이 이 시기의 나를 훈련시켰습니다. 작품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겉멋이 빠지고 실제적이 된 거지요. 의욕만을 가지고 쓰는 일 없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내 의사가 반영된 음악 건축물이 제대로 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 사고 아래 곡들을 구상하곤 했습니다."
1978년에 발표한 '결'은 바로 이 독일 유학시절의 결실이었다. 이 시기에 특히 '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이건용은 나뭇결이나 머릿결 등의 미세한 질감까지도 섬세한 음색을 통해 표현해내고자 했다.
그런데 이듬해 한국에 돌아온 그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80년대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가치로운 음악은 무엇인가', '민족음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게 했다.
그후 한국적 음악어법을 추구하는 민족음악은 그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작곡을 활발하게 했던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것은 그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테마였다. 이로 인해 그는 오늘날 대표적인 민족음악 작곡가로 손꼽힌다.
그러면 그가 추구하는 민족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는 민족음악은 단지 음악을 통한 가치로움을 찾는 방법 중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민족음악은 내 목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서 뭔가 가치있는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결국 우리 음악과 우리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지요."
그에 의하면, 음악행위의 가치로움은 바이올린을 뛰어나게 연주한다거나 작곡을 잘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술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 현실 속에서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문제의식을 작품 속에 담아낼 때 그 예술은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동안 발표한 작품 속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특히 그가 1985년과 1987년에 각각 발표한 칸타타 '분노의 시'와 국악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만수산 드렁칡'은 그의 치열한 현실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시편을 가사로 하여 만들어진 '분노의 시'는 종교적인 합창음악에 속하지만, 시편의 말씀을 빌려 80년대 독재 정권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에서 느꼈던 그의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만수산 드렁칡'은 종교적인 소재를 갖지 않으면서 진지한 이념적 메시지를 담고자 한 작품이었다. 황지우의 시를 발췌하여 곡을 붙인 이 곡은 국악관현악과 합창이 빚어내는 신명을 통해 80년대적 슬픔을 역설적으로 그려냈다.
또한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음악 작품들은 그에게 새로운 음악 기법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서양음악을 처음으로 수용한 1세대와 서양음악을 따라가면서 다소 비판적으로 받아들인 2세대, 이 앞선 두 세대의 음악양식의 반성에서 출발한 '제3세대적' 음악적 재료들이 그와 몇몇 동시대 작곡가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우리 세대, 즉 제3세대의 작곡가들은 무엇보다 이 땅의 자생적인 음악문화를 만들어야 하며, 그것이 다음 세대의 문제의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까 공통적으로 쉬운 음악을 찾게 되었지요. 또한 보다 강력한 한국적 음악 어휘나 어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쉽고, 보다 강력한 한국적 음악어법

이건용의 새로운 음악 양식은 기존의 음악들이 너무 '서양적'인 것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대대로 전해져오는 남도의 계면 가락이나 장단, 전폐희문 같은 음악 유산들을 곡의 독특한 분위기와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데 과감하게 음악적 재료로 사용했다. 물론 이를 위해 국악기가 갖는 가능성을 최대한 살려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그러면서 한편으로 서양의 음악 어법이 필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그 양식에 기반을 두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만이 갖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국악적인 맛이나 분위기를 내기 위해 국악의 요소들을 작품 속에 사용하려는 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그가 1994년에 작곡한 칸타타 '들의 노래'를 살펴보자. 이 곡은 합창과 오케스트라로 이루어진 칸타타라는 전형적인 서구 음악 장르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적 재료들은 상당 부분 전통 요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자진모리, 중모리 등의 장단과 남도 계면조, '새야 새야' 선율들이 근대적인 화성이나 대위법적인 처리 등으로 변형된 것이다.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이 곡은 오늘날 한국적 합창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표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때로 이건용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음악이 너무 무겁고 진지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는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화사하고 밝은 작품을 쓰고 싶었지만 내가 살아온 시대는 너무 진지했노라고.
"제3세대는 너무 진지했어요. 진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너무 어려운 환경에서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다보면 음악에 디테일들이 없어요. 뼈가 드러나고 외침이 쏟아지고, 그런 것들을 풍성히 감싸주는 뭔가가 빠져 있는 거지요."
이어 그는 미래의 '제4세대' 작곡가들에 대한 바람도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앞으로는 그런 디테일들, 예를 들면 삶의 자질구레한 데서 발견되는 삶의 기쁨에 관심을 갖는 음악들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예술은 그 사회의 반영이며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힘들고 암울한 80년대의 삶을 반영한 것이었다면 90년대 말을 살아가는 이건용의 음악은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 것인가. 요즘 그는 원초적 정서를 찾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우리 민족이 공통적으로 지닌 원초적 정서야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감동을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산별곡'이 1천 년 전의 시임에도 아직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의 원초적 정서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그는 위대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감동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서 그의 90년대 음악의 가치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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