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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채동선

운영자 0 2031
작곡가.
바이올린연주가
 전남 보성 출생
1901. 6. 11 : 전남 보성 벌교리 2-21번지에서 출생
(고 채중현씨의 장남)

1953년 사망

■ 학력
- 제일고등보통학교
- 일본와세다대학교 / 영문학
- 독일슈테르센음악학교
1919. 2. 28 : 경기고보 수료
1921. 3. 10 :와세다 대학 문학부 졸업
1924. 3. 10 :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1924. 5. 10 : 독일 백림대학 유학
. 리하르트 하르쳐씨에게 바이올린 師事
. 뵐헤름 클라테씨에게 작곡 사사
1925. 9. 1 : 백림 슈테프쉔 콘서트리움에서 修業(1년간)
1945. 8. : 고려음악협회장

■ 연주.활동경력
고려음악협회장
채동선현악4중주단 결성
국악채보 작업
1947. 2. : 한국문필가협회 부회장
1947. 4. : 고려 작곡가 협회장
1947. 5. : 서울 특별시 문화 위원
1947. 6. : 문화단체 총연부 위원장
1948. 8. : 고려 합창단 창단
1949. 4. : 문교부 예술 위원
1950. 3. : 국립극장 운영 위원
1950. 5. : 서울대 숙명여대 교수
1952. 10 : 예술원 위원
1953. 2. 2 : 서울대학 병원에서 53세로 별세
1979. : 은관 문화 훈장 수여

1931. 3. 1 : 독립운동에 가담
日本 山田耕作의 신 交響樂團의 단원 활동
1929-1939 : 4회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
1932 : 한국 최초로 현악 4중주단 창단하여 실내 음악 확산 운동 전개 하였으며 악보없는 단악을 채보하여 체계화했다.
또 독창곡,교향곡, 독립축전곡,합창곡,기악곡,한국민요편곡,국악등 130여곡을  편작하였으며 傾 음악가, 極右親美 음악가를 규합하여 고려 작곡가협회를 구성 민족주 의 음악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실내음악 운동을 전개하여 우리나라 현대음악을 창출하는 선구자역할을 해냈다.
 


- 관련문헌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국이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한점 꽃이 인정스리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높푸르구나』

  이 시는 암울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음악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채동선의 대표적 가곡, '고향'의 노랫말이다. 작사자는 한국 문단사에 빛나는 거목으로서 큰 자리를 차지했던 정지용이다. 이 곡은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성을 서정성 깊은 선율로 노래하면서 오랫동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이 곡은 도중에 박화목 작시의 '망향' 또는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로 노랫말이 바뀌어져 불려야만 했던 '비운의 가곡'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의 작가 정지용이 6·25때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찍혀 금지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곡 '고향'은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곡집에 예외 없이 수록되는 인기가곡이다 보니까, 각 출판사들은 급한대로 박화목의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였고, 후에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모든 가곡을 다른 가사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고향'의 가사는 노산 이은상 '그리워'로 대체된다. 지금의 4·50대 중장년층에게 특히 잘 알려진 이 곡이 '그리워'란 제목으로 더욱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 곡이 본래의 노랫말을 되찾은 것은 1988년 정지용을 비롯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이후였다. 1993년에 발간된 채동선 작품 제2집에는 9편의 정지용 詩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아버지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벌교의 이름난 부호였던 채중현은 현재 벌교 남국민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힘을 기울인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남달라서, 어린 채동선은 여덟 살 때까지 벌교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머슴)들에 업혀서 통학을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제일고보(현 경기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절에 채동선은 학업에 열중하면서, 뜻이 맞는 친우들과 함께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등 민족의식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고취시켜 나갔다. 채동선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고 이의 실천을 위해 평생동안 온 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절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료된다. 슈만이 파가니니의 독주회를 듣고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가로서의 길을 결심하듯이, 선천적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채동선의 음악가로서의 길은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급기야,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1년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장안에 바이올린 소지자가 4,5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정진은 유보된 상태였다. 한편, 경기고보 시절 뛰어난 학업 성적과 학우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채동선은 1919년 '3·1만세사건'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고, 왜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4학년 때 경기고보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1924년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물론 이 시절에도 채동선은 일본 바이올린계의 원로인 多忠朝 문하에서 4년동안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일본 교향악계의 개척자인 일본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일본 각지에 연주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채동선은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하여 리햐르트 할체에게 바이올린을 그리고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926년에는 -훗날 지금의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확대개편되는- 베를린 '슈테른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채동선은 제2의 삶을 함께 하게될 부인 이소란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만남은 채동선의 여동생인 채선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소란과 채선엽은 이화여중 동기로서, 나란히 이화여전의 영문과와 음악과에 진학하였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함께 다니며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채선엽은 이소란에게 늘 오빠 자랑을 하였고, 마침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채동선을 두 사람이 마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원산항에 바로 도착하여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온다더군요. 그래서 선엽씨와 함께 서울역에 밤 9시 30분에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한 학생이라 해서 씩씩하고 야심에 찬 청년인 줄 알았는데 매우 수수한 사람이더군요"라고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193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등을 취입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오사카 공회당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가졌는데, 당시 '아사이'신문에는 '精度에 들어선 유망한 예술가'라는 평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8년 귀국하여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계속된 국내활동으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성악가의 명성을 누린다. 채동선 집안의 음악적 소질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채동선은 귀국하자마자 연희전문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1929년의 귀국독주회를 필두로 1939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였다. 홍난파는 11월 29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채동선의 제금독주회를 앞두고'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통해서 채동선을 '겸허하고 심중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적막한 반도악단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천재음악가'로 천명한다. 독주회가 끝난 후, 한 외국인도 30일자 조선일보에 '조선에 온 이후로 처음 만나는 제금가로서, 풍부한 음악적 지식, 정확한 소리, 인격의 고결함을 예술적으로 표상한 채동선이 조선의 최고예술가가 되리라'는 극찬의 평을 하였다. 채동선은 솔리스트로서의 활동 외에 실내악 활동에도 힘을 써, 1930년에는 채동선 실내악단을 만들었고 최호영 (제2바이올린), 이혜구 (비올라) 그리고 일본인 첼리스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사중주단을 결성하여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1932년에 작곡한 현악사중주곡 제1번, op. 3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에는 글의 서두에 소개한 그의 대표적 가곡 <고향>이 발표되었다. 1937년에는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으며, 1939년에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이미 우리의 민요채집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면서 우리의 전통 민요를 채집·편곡하였다. 이 작업은 해방 이후까지 계속되면서 당시 음악인들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우리의 전통음악발굴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일제의 발악이 극한에 이르던 일제 말기에 온갖 제재가 가해지자, 채동선은 모든 대외적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고향의 땅을 처분하여 서울 근교인 수유리에 2만평의 땅을 사서 고등소채와 관상묘목 등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절에 작성하여 남겨놓은 농작물 재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지금 보아도 원예의 훌륭한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으며, 관상수와 화초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식용작물 재배에 국한되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망인이었던 이소란 여사는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 유학까지 한 양반이 새벽마다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신고 [명륜동 자택에서부터] 10여리 길을 걸어 수유리까지 갔다가는 해질 무렵에야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측은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화가 치밀 때가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채동선은 '한국 사람은 농촌을 알아야한다'고 하면서 '머지 않아 해방이 될 것이라며' 염려하는 부인을 달랬다. 그리고 일제의 압제가 극도에 달해 한복을 입지 못하게 했을 때에도 언제나 한복을 입는 것을 고집하였고, 성북동 집의 문패에도 성북동 183의 17이라는, 즉 숫자 사이에 우리말 '의'를 집어넣어 굽힐 줄 모르는 민족의식을 지켜나간 일은 채동선과 연관되어 자주 언급되는 에피소드이다. 채동선은 농작물 재배 외에 사진에도 취미를 붙여 집안에 암실을 설치하여 사진을 직접 현상하기도 하였다. 어떤 일이건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철저하게 몰입하는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자, 채동선은 그 동안 참고 살아왔던 정열이 일시에 폭발하듯 한국 악단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 해방 후 당시 음악계는 좌·우의 음악세력으로 양분되어 심각한 대립의 양상을 보였는데, 채동선은 이들의 중간에 서서 민족주의적인 음악가들의 단합을 역설하면서, 1945년에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였고, 1947년에 협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해 12월에 발표된 「음악문화 건설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서 건전한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 상아탑에 안주하는 예술지상주의를 질타하며 "국민된 책임감을 가지고 민족자결정신을 신봉하고, 모든 데카당적 악마주의를 배척하면서 정통적 순수음악의 수립을 음악문화 건설을 위한 기본이념"으로 주창한다. 그리고 5대 문화기관, 즉 국립교향악단, 국립합창단, 국립음악학교, 국립 육군취주악단 및 국립음악출판사의 설립을 제안한다. 그리고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에 그리고 그 이듬해에 발표한 「문화정책의 수립」과 「문화정책 偶感」 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는 '신생 대한 독립국'의 국가 정책 수립에 있어서 문화부문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열변을 토한다.

  문화관련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채동선은 한국문필가 협회 부위원장 (1947), 고려작곡가협회 회장 (1947),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1947),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부위원장 (1947), 문교부 예술위원 (1949), 국립극장 운영위원 (1950), 국악원 이사(1950), 예술원 이사 (1952)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으며, 1952년에는 서울대 상과대학과 숙명여대에서 독일어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해방 이후 작곡된 작품으로는 조국광복의 기쁨에서 작곡한 교성곡 <조국>, <독립축전곡>, 칸타타 <한강> 등과 <선열추모가>, <한글날> <3·1절>, <개천철>, <무궁화의 노래> 등이 있다. 그 이전에 작곡된 곡들이 주로 서정적이면서 토속성 강한 경향을 보였다면, 해방 이후에 작곡된 곡들은 해방된 국민을 계몽하고 조국 건설을 기리는 곡들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민요편곡 및 전통음악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여 <서울 아리랑>을 비롯하여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흥타령> 등 많은 우리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하고 <별유천지> 등을 채보하기도 하였다.

  1953년 2월 2일, 6·25의 종전을 알리는 포성이 한창일 무렵, 채동선은 부산 피난 생활의 고생으로 병을 얻어 부산으로 피난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영양실조에 복막염이 겹쳐 5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79년, 때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는 고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며 은관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1983년에는 작곡가의 사망 30주기를 계기로 원로 음악평론가인 박용구를 회장으로 음악계 인사, 미망인 이소란 여사 및 그의 자녀들이 중심이 되어 '채동선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매년 젊은 음악가에게 '채동선 음악상'을 수여하게된다. 그러나 미망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한 이후 이 기념사업은 아쉽게도 중단되고 만다. 1989년에는 '자랑스런 보성 사람'임을 자각한 보성군 관계자들에 의해 높이 3.6m, 넓이 3m 크기의 기념비가 벌교읍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벌교공원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1993년에는 40주기를 맞이하여 채동선 기념사업회에서 작품집 『고향』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1995년 9월에는 문화체육부가 선정한 '이달의 문화인물'이 되었으며, 광복 50주년 '채동선 기념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 근·현대 음악사 정립에 관심을 가지는 음악학자들이 그 수를 더해가면서 한국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채동선의 음악적·문화사적 업적을 학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채동선의 가곡 외에 현악사중주, 현악앙상블 등의 기악작품을 비롯하여 교성곡, 칸타타 등의 채동선의 작품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근간으로 하면서 그의 음악관 및 사회적 활동 모든 것이 보다 포괄적으로 조망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김용환(한국종합예술학교 예술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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