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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 1919-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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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동경 무사시노 음대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천애 선생은 관현악단 서울심포니의 창단멤버로 활약했고 해방직후에는 현제명씨 등과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남산음악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는 등 해방후 국내 음악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72년 이민 가기 전까지 숙명여대교수와 학장으로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그녀가 우리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봉선화」를 무대에서 최초로 불러 우리의 민족가곡으로 승화시켜 활짝 꽃피게 한 점이다.
1942년 동경 무사시노음대를 졸업하면서 각 음대 졸업생 대표들만 참가하는 히비야공회당의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당시 23세였던 「김천애양」이 흰색 한복을 입고 출연,독일가곡을 부른후 앙코르곡으로 「봉선화」를 불러 음악회에 참석한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다른 청중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안겨줬던 것.

지난 90년 11월 미국으로 이민간지 18년만에 고국을 방문했던 김천애 선생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음악회가 끝난후 한국 학생들이 모두 무대 뒤로 찾아와 동경 한국YMCA로 몰려가 밤새 울면서「봉선화」를 불렀던 감격의 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나라잃은 슬픔을 애조띤 멜로디와 가사로 은유한 「봉선화」가 민족가곡으로 유명해짐에 따라 선생은 해방될 때까지 여러번 일경에 불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봉선화」는 선생이 히비야공회당 공연에서 부르기 전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곡이었는데 그해 가을 서울 평양등지에서 귀국공연을 가지면서 한민족 애창곡의 하나가 된것. 그 결과 일제는 가사내용을 문제삼아 가창금지는 물론 빅터레코드사에서 제작된 그의 음반까지 판매를 불허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와 학교강당을 중심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봉선화」를 계속 불러 경찰에 연행되거나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1919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선생은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감리교목사)의 영향으로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는데 무사시노음대 졸업생대표로 선발될 만큼 천부적인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평생을 홀로 지냈는데 『음악활동에 바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밝힐만큼 음악과만 살아왔으며 개인 사정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후에는 교회연주를 주로 해왔다.그러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해 고령에도 불구,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 없이 1995년 3월 30일 타계할 때까지 미국땅에서 혼자 생활해 왔다.

출처 : 동아일보(1995. 4. 3자 ) , 월간오디오(1988. 7월호)



김천애선생의 프로필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 성악과 졸업
만주 신경음악원 성악원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역임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 역임
1995년 3월 30일 永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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