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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록

현제명(玄濟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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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제명은 1902년 대구 남산동에서 대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엄한 부친 밑에서 성장한 그는,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으며 교회에서 노래를 잘 불러 칭찬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형과 함께 머리를 짧게 잘라 부친으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고 그의 형제는 서로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그 길로 가출을 하여 형은 일본으로 떠나고, 아우인 현제명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집에서 학비를 대주지 않아 고학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그가 4학년 때, 미국에서 온 전도사이며 사업가인 로디히버로부터 음악성을 인정받아 결혼 6개월만에 신혼의 단꿈을 접어둔 채 유학길에 올랐다.
이 유학시절에 그는 너무나 유명한 <고향 생각> <산들 바람> 등의 가곡과 몇 곡의 찬송가를 작곡했다.

1929년 현제명은 연희전문학교 영어 교수로 부임하여 음악부를 만들고 합창단과 교향악단을 조직하여 과외활동으로 지도했다. 이 음악부는 훗날 많은 음악가가 배출되는 요람이 되기도 하였다. <동심초>를 작곡한 김성태 선생도 이 음악부에서 활동하다 그의 전공인 상과를 버리고 작곡가가 된 사람이다.
현제명 선생은 작곡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사도 하였으며 또 성악가로서도 활동했다. <고향 생각> <산들 바람> <희망의 나라로> <니나> 등 상당수의 가곡들은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곡들이다. 1932년 '조선음악가협회'를 조직하여 음악가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나섰으며 <대한의 노래>를 작곡하여 일제치하에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보급하였으나 노래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음악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해방후 한달 만에 그는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해 관현악 운동을 시작하고 그해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인 경성음악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를 설립했다.

현제명의 또다른 업적은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하므로서 오페라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오페라를 꽃 피운데에 있다. 그는 한국음악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55년 예술원예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0년 고혈압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족사의 격동기를 헤치며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음악교육에 헌신하므로서 우리나라 음악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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