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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淸論 卓說을 대신하여

鄭宇東 0 1647
지인들이 모여서 카페를 하나 열려고 하는데
그  카페 이름을 청론탁설(淸論 卓說)로 하자는데 대하여
그 대신 청론 탁설(淸論 濁說)로 이름붙이기를 제안하면서
좀 구차하지만 그 절실한 이유를 에둘러 찾아 봅니다.

자연의 모든 빛이 어울리면 밝은 백광이 됩니다. 
자연의 순정무위는 진진 진선 진미로 나타납니다.
인공의 모든 물감은 섞으면 어두운 흑색이 됩니다.
인간의 욕심과 손길이 오염과 혼탁의 주범입니다.
청과 탁은 서로를 도와서 완성하는 도량의 조건입니다.

동양음악에서 지극히 좋은 음악은 至樂無聲입니다.
선방에서는 不立文字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대덕들은 以心傳心으로 꽃을 꺾어들고 빙긋이 웃을 뿐으로
법통을 물려주고 받아서 대를 잇습니다.
서양에서도 존케이지가 4분 33초동안 무성음악을 연주하고
그의 친구 라우셴버거는 이에 앞서 선구적으로 캔버스만의
백지그림을 전시하여 무성음악의 아이디어를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동학한 좋은 인연 등으로 이미 만났습니다.
논어에 "以文會友"하고 "以友輔仁" 한다 하였습니다.
학문으로써 벗을 만났으니 이로써 인덕을 쌓는데 도웁니다.
사바 세상에 살면서 어찌 淸論 卓說만 말하겠습니까
시정속인 우리의 일상은 淸論에 濁說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탁설은 청론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법없는 사회가 목적입니다.

캄캄한 칠흑의 밤이 있기에 낮의 밝음이 더욱 빛나고
낮의 광명 공명 세상이 밤의 악행의 검은 세상을 경계합니다.
선에도 지고지순만을 뻑뻑히 고집하는 아집의 불선이 있고
악에도 선악간의 공존을 용인하는 정도의 선량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일백퍼센트 순도의 순정한 행복을 바라지만
어두운 병적 암적 존재와 더불어 살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은 청탁이 혼재하는 세상살이 속에서도 슬기롭게 주체
적으로 처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연꽃이 오예속에 피어나도 정결한 아름다움을 지니듯이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처하는 곳마다에 주인이 되면 서있는 곳이 다 참되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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