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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歌(사뇌가)에 대한 一小考

鄭宇東 0 1845
향가와 향찰

향가란 삼국시대 말엽에 발생하여 통일신라시대 때 성행하다가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고려 초까지 존재하였던 한국 고유의
정형시가(定型詩歌)를 말합니다.

옛날에 우리말을 기록하는 글자가 없을때는 漢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를 향찰, 이두문
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신라의 노래는 향찰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향찰로 노래를 기록한 [謠系 鄕歌]가 있는가하면 
노래외의 일상용어나 공문서로 작성하는 것을 향찰이라 하여
향가와 이런 [非謠系 鄕歌]를 일단 구별할 수 있습니다. 

향찰은 향가에만 쓰인 것이 아닙니다.
향찰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한
하나의 '문자'입니다. 한글로 시만 쓰는 것이 아니듯,
향찰로 향가 뿐 아니라 필요한 여러 곳에 쓰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비석의 비문이나 게송(불교 노래),
초기의 가사 등에서 보입니다. 특히 우리가 가사의 첫 작품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승원가, 혜원가 는 향찰 표기로 발견되었습니
다. 정리하자면, 향가는 향찰로 창작된 문학이지만,
향찰이 향가만을 위한 표기 수단은 아니었고, 조선시대에 이르
기까지 사용된, 한자를 우리말에 맞게 전면적으로 표기한 '문자'
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향가는 이와같이 향찰(鄕札) 및 이두(吏讀), 곧 한자(漢字)의 음
(音:소리)과 훈(訓:새김)을 빌어서 표기되었습니다. 전래 문헌에
의하면 향가의 뜻은 사뇌가(詞腦歌) ·도솔가(兜率歌) 또는 국풍
(國風) ·자국지가(自國之歌), 즉 국가(國歌), 신라시대 고유의 노
래, 동방 고유의 노래이며, 좁은 뜻으로는 신라의 가요 또는 고향
의 노래 등 국문학자들의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의 사뇌격(詞腦格), 《삼국유
사》 권2의 사뇌가, 《균여전(均如傳)》의 사뇌 ·사뇌자(詞腦者)
등의 명칭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이설이 있으나, 이들 이설 모두
가 동방(東方)이라는 뜻이므로 사뇌가는 ‘동방의 가요’라는 뜻으
로 중국시가가 아닌 뜻으로 향가와 동의어(同義語)로 봅니다.

향가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에서 고려 광종 때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에 이르기까지 약 370
여년 동안 성행한 듯하나,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이다. 그것을 형식면에서 구
분하여 보면 4구체(四句體) ·8구체(八句體) ·10구체(十句體)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4구체로 된 작품은 비교적 원시적인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서동요. 풍요(風謠). 헌화가(獻花歌). 도솔가 등 4수가 있습니다.
이 중 《서동요》와 《풍요》는 발생 전설 및 창자(唱者)나 내용상
으로 보아 그것이 본질적인 민요이고, 《도솔가》나 《헌화가》
자체로 보아서는 민요가 아니지만 민요형식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도솔가》나 《헌화가》를 민요형식으로 보는 것은, 《서동요》와
《풍요》가 민요인데 그것이 4구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하는 것
이 아니라, 신라의 가요형식을 이어받은 고려의 가요[俗歌]가 역시
4구체였다는 점 외에도, 삼국시대 중엽까지 한국 말로 된 노래 중에
상류계급(지식층)과 서민층의 노래가 분립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
입니다.

지식층이 많지 못한 시대는 그들만의 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민층이 부르던 것도 민요형이고, 지식층의 어떤 개인이
노래를 짓는다 할지라도 스스로 기존 시가형인 민요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태 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대의 시가는 음악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부터 불러오던 음악적 창조(唱
調)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 이루어지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가악(歌樂)이 발달하고 사상 감정이 진보하여 4구체에서
그 배구(倍句)인 8구체가 발생되었다 하더라도 초기는 기존 시가형과
병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새로운 시가형이 파생되었다 해서 기존
시가형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8구체 향가가
이루어진 뒤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4구체의 민요형을 취해서 노래를
짓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월명사(月明師)는 4구체인 《도솔가》 외에
도 10구체인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4구
체나 8구체 또는 10구체의 노래가 모두 한국 말로 된 노래라는 뜻에서
향가라고 통칭했던 것인데, 그 중 10구체의 향가는 특히 사뇌야(詞腦野)
지방에서 주로 유포 ·발달하였고, 국가적인 가악에서 그 음악을 사뇌악
(詞腦樂)이라 하였으므로 이 10구체를 사뇌가라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한편, 8구체는 상당히 정제(整齊)된 형식으로 발전된 것인데, 전 ·후절의
구별없이 8구로 되어 있으며 4구체가 발전된 형태입니다. 해설 역문(譯
文)에 의하면 8888, 8888, 후구 88의 형식을 취한 듯하며, 《모죽지랑가
(慕竹旨郞歌)》 《처용가(處容歌)》의 2수가 이에 해당한다. 다음 10구
체는 향가의 형식이 거의 완성된 단계로서, 전후 양절을 나누어 전절
8구에 후절 2구, 모두 10구로 된 향가의 대표적 형식입니다.


어학적 가치와 연구해독

향가는 고대국어 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중심적인 자료가 됩니다.
사서들에 보이는 인명이나 지명의 표기에서 시작하여 서기체(誓記體)
나 이두문(吏讀文)으로 된 기록들이 없는 바 아니나, 그것들은 단편적
인 어휘기록에 그치거나 변칙적인 반한문적 기록들이고 완전한 우리말
문장으로 된 자료로는 오직 향가가 있을 뿐입니다. 다만, 향가는 그 표
기방법이 한자의 새김(釋, 訓)과 음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는 일종의
차자표기방법(借字表記方法)인 향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독(解
讀)을 거치지 않고는 어학적 연구자료로도 이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이해를 위한 문면의 확보도 될 수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데,
반세기 이상에 걸친 여러 연구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만족할
만한 단계에까지는 도달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재의 실정입니다.

19세기말까지는 향가를 해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증좌를 발견할
수 없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해독에의 길이 열리게 되는데,
이 단계의 작업이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영위되었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창기의 향가 해독자들이 다투어
<처용가>를 해독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고려가요 가운데 가명과
내용이 비슷한 노래가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고 할 수 있겠고, 그 다음에 <풍요>나 <서동요> 같이 비교적 길이가
짧고 내용이 간단해 보이는 것들에로 관심이 퍼져나간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향가 25수 전체에 대한 최초의 해독은 오꾸라
신뻬이(小倉進平)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び吏讀の研究)》
(1929)를 효시로 합니다.
비록, <우적가> 같은 노래에 있어 일부 해독을 유보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25수 전체를 읽어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안목에서 보면 상당한 허점이나 결함이 발
견되고, 그가 해독의 기준으로 제시한 원칙들이 잘 지켜져 있지도 않
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의 식자들을 경
탄시키기에 충분한 업적이었습니다.

오꾸라의 저작에 자극을 받고 각고 끝에 나온 양주동(梁柱東)의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研究)》(1942)는 오구라의 경지를 넘어서서
향가 해독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 책이 오랫동안 향가 해독의
정본(定本)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여 왔다는 것은 향가에 대한 어학적 ·
문학적 연구의 대부분이 그의 해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
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해독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해박한 지식과 광범위한 문헌섭렵 및 강인한 천착 등의 종합적
결과이지만, 詩作의 경력을 지닌 문학적 직관의 공로도 간과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주동 이후의 해독작업은 지헌영(池憲英)의 《鄕歌麗謠新釋》(1947),
이탁(李鐸)의 《국어학논고(國語學論考)》(1958), 김선기(金善琪)의
<향가의 새로운 풀이>(現代文學 145~250호 사이 16회에 걸쳐 연재),
서재극(徐在克)의 《신라향가(新羅鄕歌)의 어휘연구(語彙研究)》(1974),
김준영(金俊榮)의 《향가문학(鄕歌文學)》(1979),
김완진(金完鎭)의 《향가해독법연구(鄕歌解讀法研究)》(1980)로 이어
져 오며, 해독의 원칙과 실제 양면에 걸친 발전을 보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고대국어의 특징들도 어느 정도 부각되고 있으나, 더 많은 것이 앞
으로의 연구에 기대된다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개괄적으로 살펴본 바로는
향가의 소멸시기, 향가가 행해지던 지역적인 범위, 향가의 총작품수(失
傳작품 포함) 등에는 여러 이설과 의문이 많으나, 향찰이 발명되기 이전
의 작품은 표기문자가 없어서 구전(口傳)되다가 소멸하였거나, 또는 향
찰로 표기되다가도 소멸되어 전승되지 못했던 듯합니다.
특히 오늘날 이름만 전해지는 향가집(鄕歌集) 《삼대목(三代目)》이 실
전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나 현전하는 25수야말로 국문학사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신라문학에 접할 수 있고, 당대의 문학적 생활
을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또 향가는 훈민정음 이전의
고어 연구를 위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향가가 훈민
정음 이전의 표기형태인 향찰이나 이두로 기록된 작품이므로, 그 해독에
어려움이 따르고 각각 해독자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다는 점도 이
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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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백과] 향가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향가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鄕歌及ぴ 吏讀の硏究 / 小倉進平(오꾸라 신뻬이), 1929년
* 朝鮮古歌硏究 / 양주동, 박문서관, 1942년
* 麗謠箋注 / 양주동, 을유문화사, 1947년
* 鄕歌麗謠新釋 / 池憲英, 정음사, 1947년
* 향가·여요의 현대성연구/ 윤경수, 집문당, 1993년
* 고려 향가 변증 / 박재민, 박이정 출판,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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