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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들의 사랑과 결혼

鄭宇東 0 2190
음악가들의 사랑과 결혼

흔히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추구하고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반드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간 음악가들이 의외로 많고, 총각으
로 평생을 지낸 독실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작곡가들로는
 * 바바라와 막달레나를 차례로 맞아들인 요한 세바스찬 바하와
 * 16살의 제자 마르타 지글러와 결혼한 바르토크(Bela Bartok),
 * "유태인"을 작곡한 알레비의 딸 즈느비에브와 결혼한 비제,
 * 양쪽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케르마코바와 결혼한 드보르작
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크의 아내 니나 하게럽은 그리크의
가곡을 전공한 성악가였습니다.
 * 시벨리우스는 결혼 당시 빈털털이였습니다. 헬싱키 음악학교
시절의 친구 아르마스의 여동생 아이노는 시벨리우스가 일생
동안 사랑했던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아이노는 남편이 집안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돈 문제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 말러와 결혼한 알마 마리아 쉰들러는 말러에게 작곡을 배운
제자였습니다. 결혼생활은 기복이 심하여 결국 이혼하고 말았
습니다. 말러가 죽고나자 알마는 건축가인 그로피우스와 재혼
했고 그후 작가인 베르펠과도 결혼했으며, 화가인 아스카 코고
시카와는 염문을 뿌렸습니다.
 * 베를리오즈는 아일랜드 태생의 셰익스피어 연극 배우 해리
엩 스미슨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으나 결혼 7년만에 불화가 시작
되었습니다. 질투심에 불타는 아내를 버려두고 11세 연하의 성
악가 마리 레치오와 벨기에 연주여행을 떠나는 등 그는 여행때
마다 레치오를 동반했고, 이때부터 아내와는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 갔습니다. 1854년 해리엩이 뇌일혈로 사망한 후 그해 가
을 그는 레치오와 재혼했습니다.
 * 클로드 드뷔시는 그의 "녹턴"을 첫째 부인 로잘리에게 헌정
했습니다. 그러나 5년 후 한 은행가의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습
니다. 충격을 받은 로잘리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목숨
은 건졌습니다. 이혼을 한뒤 두번째 아내인 엠마 바르닥과는
종신토록 살았으나 첫 아내에 대한 파렴치한 행동 때문에 사회
적으로 많은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 베르디가 젊었을 때 그를 도와 주었던 후원자의 딸 마르게리
타 바레지는 베르디와 결혼한 후 두 아이를 낳고 일찍 병으로
죽었습니다. 베르디는 오랜 교제 끝에 45세 되던 해 유명한 소
프라노 쥬제피나 스트레포니와 재혼했습니다. 
 * 푸치니는 친구의 아내였던 엘비라 제미냐니를 빼앗았습니다.
이들이 결혼한 뒤 엘비라는 심한 의부증에 걸려 여자 시종과 자
기 남편의 불륜관계를 주장하니 그 소녀가 자살을 기도하여 법정
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끝난 다음 푸치니와 아내는 화해했습니다.
푸치니에게는 친구 레온 카발로가 라보엠의 작곡에 착수한 것을
듣고 서둘러서 작곡을 먼저 마쳤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롯시니의 첫번째 아내는 스페인 태생의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으로 그의 오페라 세리아 "제미라미데"에 출연한 가수였
습니다. 결혼 생활 15년 만에 이혼한 로시니는 당시 54세의 나
이로 파리의 술집 마담 올림피 데길리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생  상은 39세의 나이로 20세 연하인 마리 트뤼포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나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이들은 결혼 후 6년
만에 별거에 들어갔지만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 리스트는 한때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여성팬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중에서도 다구 백작부인은 리스트의 아이를 셋
이나 낳아 길렀습니다. 유명한 코지마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또 카롤린 비트겐슈타인 공주는 연주 여행보다도 작곡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데 힘을 썼습니다.
 * 바그너는 여배우 민나 플라너가 23세때 그녀와 결혼한 후 25
년동안 법적인 부부였으나 이들은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민나가 바그너의 바람을 참다 못하여 집을 나가버리자 바그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코지마 리스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코지마
는 프란츠 리스트의 딸로 바그너의 친구였던 지휘자 한스 폰 뷜
로우의 아내였기에 당시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 브람스는 많은 여성들과 사귀었고 사랑들을 체험했으나 결혼
은 한번도 하지 않고 총각으로 지냈습니다. 그의 사랑의 역사에
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7세 연상으로 스승의 미망인인
클라라 슈만과 정신적 사랑을 나눈 것이었습니다.
 * 슈베르트는 많은 친구들과 교우관계를 나눈 쾌활한 청년이
었기 때문에 31세의 나이로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슈베르트는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쇼  팽은 남장 여인으로 유명한 작가 조르쥬 상드와 염문을
뿌렸으며, 이들이 헤어진 후 1년 만에 소팽이 사망했습니다.
 * 라  벨은 화장품에도 신경을 쓸만큼 페미니스트였지만 결혼
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거의 무시했습니다. 라벨
은 잠시 동안의 염문도 뿌리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거의
전적으로 음악에만 전념하였습니다.
 * 차이콥스키는 동성애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의 주변에 젊은 청년들이 몇 있었고 젊은 여성제자와 결혼하
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습니다. 차이콥스키의 생애에
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성은 폰 메크부인입니다.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에 대한 경제적, 정신적 후원자이었습니다.

 * 베토벤은 평소에 비인의 많은 여성들과 사귀었습니다.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성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불멸의 연인
에게"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 학자들과 역사가들이 많은
논란을 벌여 왔습니다. 그 후보명단에 8명이나 등장합니다.
o 베티나 브렌타노 ( 1785 ~ 1859 )
  괴테와 베토벤 등의 예술가 클럽에 참여했던 여류시인으로
  그녀가 결혼했을 때 베토벤은 축시를 지어 보냈습니다.
o 요제피나 브룬스비크(1799~1821)
  헝가리 귀족 브룬스비크 가문의 딸로 비인에서 피아노레슨을
  받았습니다. 결혼후 미망인이 되자 관심을 보였고 그녀의 집
  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석하였습니다.
o 테레제 브룬스비크 (1775 ~ 1861)
  요제피나의 언니로, 로맹 롤랑이 그녀를 불멸의 여인으로 지목
o 마리아 에르되디 ( 1779 ~ 1837 )
  헝가리 백작부인으로 베토벤과 함께 피아노 듀오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1808년 이 부인 저택에 하숙을 하자 구설수에 오르
  기도 했고 5개월 후 둘이는 서로 다툰 다음 헤어졌습니다.

o 도로데아 본 에르트만(1781~1849)
  매우 오랫동안 교제했던 매력적인 용모,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여류 피아니스트로"불멸의 연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o 쥴리에타 구이치아르디(1784~1856)
  베토벤이 월광 소나타를 헌정한 장본인입니다. 그가 30세때
  17세의 줄리에타를 가르쳤습니다. 베토벤이 죽은 다음 그의
  유품에서 쥴리에타의 초상화가 나와 친구 안톤 쉰들러가 그녀
  를 유력한 후보자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o 라헬 베른하겐 폰 엔제 (1771~1833)
  1880년대 초에 베를린 저택에 문학 예술살롱을 가지고 있었던
  유태인 여성으로 재색을 겸비하였습니다. 결혼한 후 테플리츠
  온천에서 휴양하러온 베토벤을 처음 만났습니다.
o 막달렌느 빌만 ( 1775 ~ 1801 )
  본 출신의 성악가이었습니다. 베토벤이 청혼했지만 거절했다고
  그녀의 조카가 주장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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