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무용음악
鄭宇東
0
1907
2015.03.05 23:29
세계의 무용음악
"무용은 움직이는 음악"이라고 게오르그 발란쉰도 말했듯이,
음악과 무용은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발레의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편이 유력합니다. 궁정의 각종
음악이나 연극의 막간에 발레가 공연되었고 1489년 밀라노의
가제트公과 아라곤의 이사벨라 공주와의 결혼식에서 상연된
공연물이 발레의 원형에 속합니다.
1572년 앙리 4세는 프로테스탄트로서 위그노전쟁에 승리한 후
신구교도의 화해를 굳게하기 위하여 구교도인 샤를 9세의 누이
마그리트와 결혼하는데 이 결혼식에서 피에르 드 롱사르가 제
작한 가면 무도회 "사랑의 낙원"이 공연되었는데 이것이 프랑
스 궁정 발레의 전신입니다.
1600년 10월 6일 피렌체 메디치家의 카테리나 공주와 프랑스의
앙리 4세의 결혼식은 성대한 축하연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서
발레가 공연되었습니다. 이때 메디치가에서 혼수와 함께 많은
시종을 딸려 보냈는데, 그 중에는 음악가겸 무용가인 벨지오소
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벨지오소는 이름을 프랑스 式으로 보
주와로 고치고 프랑스발레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1660년 11월 22일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와
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루브르궁의 대 발코니에서 륄리의
발레음악 "툴루즈의 발레"가 연주되었고 이 음악에 맞추어 자신
이 뛰어난 무용수이기도 한 왕과 왕비가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게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결국 프랑스의 궁정에서
꽃을 피웠고, 루이 14세의 시대를 발레의 황금기로 꼽습니다.
현재 "오페라극장"으로 알려진 음악과 무용의 전당도 1669년에
페랑이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건축한 극장이며 1671년에 개관
했는데, 개관공연은 오페라보다는 발레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바로크시대나 낭만주의 시대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발레음악을
작곡하였지만 한낱 눈요기로 전락하여 작곡가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춤을 위한 음악을 요구하는데로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레를 구한 것이 아돌프 아당의 "지젤"과 그의
제자 들리브의 "코펠리아"와 "실비아"였습니다. 차이콥스키가 무
용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들리브의 작품에 접하고 나서부
터 였습니다. 그 결과 발레역사상 눈부신 금자탑으로 우뚝 서 있
는차이콥스키의 3부작 "백조의 호수" "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도까기 인형"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발레의 강국 러시아 에서는
스트라빈스키가 "불새. 봄의 제전. 페트로슈카. 병사의 이야기"
를 작곡하였는데 동시대에 러시아 발레단의 안무를 맡은 발라
키레프와 디아길레프 같은 뛰어난 연출가가 있었습니다.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엩. 폭군이반. 신데렐라" 가
하차투리안에게 "가이느. 스파르타쿠스" 가 있고
쇼스타코비치에게는 "황금시대" 와 같은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품과 안무가로 러시아 발레의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이밖에도 무용음악으로는
모리스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볼레로"
끌로드 드뷔시의 "유희. 목신의 오후"
마누엘 데 파야의 "삼각모자. 사랑은 마술사"
아론 코플랜드의 "로데오. 애팔래치아의 봄"
벨라 바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허수아비 왕자"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발레음악이 된 작품도 있습니다.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 베를리오즈가 편곡하여 "장미의 요정"
코플랜드의 클라리넽 협주곡 => "얼룩옷 입은 피리 부는 사나이"
쇼송의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시곡 => "라일락 정원"
쇼팽의 작품중에서 관현악 편곡 => "레 실피드"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중 백조 => "빈사 상태의 백조"
"무용은 움직이는 음악"이라고 게오르그 발란쉰도 말했듯이,
음악과 무용은 처음부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발레의 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편이 유력합니다. 궁정의 각종
음악이나 연극의 막간에 발레가 공연되었고 1489년 밀라노의
가제트公과 아라곤의 이사벨라 공주와의 결혼식에서 상연된
공연물이 발레의 원형에 속합니다.
1572년 앙리 4세는 프로테스탄트로서 위그노전쟁에 승리한 후
신구교도의 화해를 굳게하기 위하여 구교도인 샤를 9세의 누이
마그리트와 결혼하는데 이 결혼식에서 피에르 드 롱사르가 제
작한 가면 무도회 "사랑의 낙원"이 공연되었는데 이것이 프랑
스 궁정 발레의 전신입니다.
1600년 10월 6일 피렌체 메디치家의 카테리나 공주와 프랑스의
앙리 4세의 결혼식은 성대한 축하연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서
발레가 공연되었습니다. 이때 메디치가에서 혼수와 함께 많은
시종을 딸려 보냈는데, 그 중에는 음악가겸 무용가인 벨지오소
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벨지오소는 이름을 프랑스 式으로 보
주와로 고치고 프랑스발레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1660년 11월 22일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와
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루브르궁의 대 발코니에서 륄리의
발레음악 "툴루즈의 발레"가 연주되었고 이 음악에 맞추어 자신
이 뛰어난 무용수이기도 한 왕과 왕비가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게 발레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결국 프랑스의 궁정에서
꽃을 피웠고, 루이 14세의 시대를 발레의 황금기로 꼽습니다.
현재 "오페라극장"으로 알려진 음악과 무용의 전당도 1669년에
페랑이 루이 14세의 명을 받아 건축한 극장이며 1671년에 개관
했는데, 개관공연은 오페라보다는 발레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바로크시대나 낭만주의 시대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발레음악을
작곡하였지만 한낱 눈요기로 전락하여 작곡가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춤을 위한 음악을 요구하는데로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레를 구한 것이 아돌프 아당의 "지젤"과 그의
제자 들리브의 "코펠리아"와 "실비아"였습니다. 차이콥스키가 무
용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들리브의 작품에 접하고 나서부
터 였습니다. 그 결과 발레역사상 눈부신 금자탑으로 우뚝 서 있
는차이콥스키의 3부작 "백조의 호수" "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도까기 인형"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발레의 강국 러시아 에서는
스트라빈스키가 "불새. 봄의 제전. 페트로슈카. 병사의 이야기"
를 작곡하였는데 동시대에 러시아 발레단의 안무를 맡은 발라
키레프와 디아길레프 같은 뛰어난 연출가가 있었습니다.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엩. 폭군이반. 신데렐라" 가
하차투리안에게 "가이느. 스파르타쿠스" 가 있고
쇼스타코비치에게는 "황금시대" 와 같은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품과 안무가로 러시아 발레의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이밖에도 무용음악으로는
모리스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볼레로"
끌로드 드뷔시의 "유희. 목신의 오후"
마누엘 데 파야의 "삼각모자. 사랑은 마술사"
아론 코플랜드의 "로데오. 애팔래치아의 봄"
벨라 바르토크의 "중국의 이상한 관리. 허수아비 왕자"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발레음악이 된 작품도 있습니다.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 베를리오즈가 편곡하여 "장미의 요정"
코플랜드의 클라리넽 협주곡 => "얼룩옷 입은 피리 부는 사나이"
쇼송의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시곡 => "라일락 정원"
쇼팽의 작품중에서 관현악 편곡 => "레 실피드"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중 백조 => "빈사 상태의 백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