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신요칼럼
신요칼럼
 

신년음악회

鄭宇東 0 1698
신년음악회

언제부터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연말이 되면 베토벤의 9번 합창교향곡을 듣
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내가 60년대 중반 클라식음악에 입문
하여 일본의 NHK방송을 청취할 즈음에는 연말 연초의 레파
토리로 연말 除夜에는 슈베르트의 8번 미완성 교향곡을 들려
주었다는 기억이 특이합니다.

빈 신년음악회(빈 新年音樂會, Neujahrskonzert in Wien,
New Year's Concert in Vienna)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인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이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 정오에 빈 음악협회 황금홀에서 개최하는 음악회로,
정식 명칭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Neujahrs
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입니다. 왈츠와 폴카 등
으로 대표되는 빈 춤곡을 빈 필이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20
년대 초반이었으며, 이후 공연 프로그램 전체를 슈트라우스
일가의 작품으로 채워넣은 연주회도 종종 열리게되었습니다.

이것을 송년/신년 행사로 정립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으며,
나치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열정적인 지원으로 1939년
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 12월 31일에 클레멘스
크라우스의 지휘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특집으로 꾸민 마티
네 콘체르트(낮 음악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크라우스는 1940년 12월 31일에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요
제프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로 짜여진 공연을 개최했으며, 이 공
연은 바로 다음 날인 1941년 1월 1일에도 반복되어 첫 번째 빈
신년음악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년음악회는 전쟁 중에도
크라우스의 지휘로 계속 개최되었으며, 종전 후 나치에 협력한
것이 문제가 되어 1946년과 1947년에 요제프 크립스가 잠시
지휘한 뒤 크라우스가 다시 이어받았습니다.

1954년에 크라우스가 빈 필과 해외 순회 공연 중 멕시코에서 급
서하자 후계자 인선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당시 빈 필의 악장이
었던 빌리 보스코프스키가 후임이 되었습니다. 보스코프스키는
1979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할 때까지 역대 최다 횟수인 25
회의 신년음악회를 개최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공연 실황이 라
디오와 텔레비전으로 국내외에 중계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보스코프스키의 후임으로는 당시 빈 국립오페라
단 음악 감독이었던 미국 출신의 로린 마젤이 1980년부터 이어
받아 1986년까지 지휘했으며, 1987년부터는 해마다 다른 지휘
자를 초빙하는 제도로 바뀌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인의 이목을 끄는 미국 백악관의 신년음악회는
1801년 토마스제퍼슨 대통령 당시 신년축하 리셉션에서 열린
미국 해병대 군악대의 연주를 시초로 계속되어 오다가
존 타일러 대통령은 아예 백악관에 고급 악기들을 갗추어 놓
고 본격적인 수준의 음악회를 주최하였으며
케네디 대통령 재임시부터 백악관 신년음악회는 이전의 가정
음악회의 성격을 탈피하고 "젊은이를 위한 젊은이에 의한 연
주회" 시리즈 프로그램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카터 행정부 시절백악관 이스트룸에 상설 공연장을 설치하여
매주 일요일 오후 TV를 통해 5시간의 공연실황을 중계하였고
1978년에는 백악관 야외 무대에서 재즈 아티스트들이 출연한
"백악관 콘서트"를 개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에도 경복궁에서 왕이 고관대작들로부터 신년하례
를 받는 의식에서 아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원래 청와대 내에서 비공개로 열리던 신년
음악회가 1990년부터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공개로 열
리고 있습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