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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세기적 대논쟁

鄭宇東 0 1603
한국적인 세기적 대논쟁

 * 자유부인 논쟁
교수 남편을 둔 여성이라면 어느 정도의 사회적 도덕률을 기대하여야
하는가? 또 바람을 피운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국동란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3월, 바람난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소설 자유부안을 둘러싸고 작가 정비석과 황산덕 법철학교수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는데 이에 더하여 변호사 홍순엽이 작가를 옹호
하는 글을 발표하여 논쟁이 더 격화하다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문제로
번졌으며 문학평론가 백철이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글을 발표한
후에야 논쟁은 가까스로 가라 앉았습니다.

포문은 서울대 법대교수이던 황산덕이 ‘대학신문’(1954년 3월 1일자)
에 “자유부인은 교수를 모욕하는 소설”이라면고 성토하면서 먼저 열었
습니다. 정비석은 열흘뒤에 서울신문에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사적 흥분에 불과하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황산덕은
서울신문에 다시 반박글을 실었습니다. “인기욕에만 사로잡힌 저속유
치한 에로작문은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적”이라
고 쏘아댔습니다. 이름하여 자유부인 논쟁이라 합니다.

소재는 작가 정비석이 1954년 1월부터 서울신문에 연재한 ‘자유부인’
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대학 교수 부인이 남편의 제자와 바람이 나고,
대학교수도 미군부대 타이피스트와 야릇한 관계에 빠진다는 줄거리
이지만 부인의 바람은 춤바람에서, 교수의 바람은 짝사랑에 그치고
결말은 두 사람을 정상적인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정도의 수준으로
지금 눈으로 보면 애정소설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썰렁’한 애정소설
이었지만 그 당시의 세평은 달랐습니다.

 *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재판
박인수 사건이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시기였던 1950년대 중반
대한민국 현역 해군 헌병대위를 사칭한 박인수가 70여명의 여성들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가졌던 성추문 사건을 말합니다.
훤칠한 키의 미남자였던 박인수는 헌병으로 복무시절 익힌 사교춤 실
력으로 여성들을 유혹했는데 피해여성들의 상당수가 여대생들이였으
며 국회의원과 고위관료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했으나, 박인수는 이
를 부인하고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하면서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
용사였던 한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면
서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단지 공무원 사칭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하여 2만원의 벌금형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2심, 3심에서는 유죄를 선고하고,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습니다.

 
 * 임신중절 논쟁
변형돈 신부와 이진우 검사

 * 엽색행각녀 어을우동의 사형

 * 사육신 논쟁
우리가 산수를 배울 때는 구구단을 외웠듯이, 우리가 국사를 배울 때는 이조의 왕위
세습도를 "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광 인 효 현 숙 경 영,
정 순 헌 철 고 순종 " 하여 27대 순종왕까지 외웠고 이어서 또 단종복위를
꾀하다 순절한 만고충신 여섯 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사육신을 입이 닳도록 달달 외웠습니다.

그런데 1974년 국정 국사교과서 편찬 당시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1977년에는 홀연히 역사전공 학자가 아닌 구석봉의 조선일보 지상을 통한 이론제
기로 근 500년간 절의의 화신으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아오던 조선 초기 단종조
"사육신"의 한 분인 충신 유응부의 사실이, 그 당시 동시에 사절한 삼중신의 한 분
인 김문기의 사실과 바뀌어졌다고 하면서, 유응부의 늠름한 충절을 우리 국사상에
서 호도 매몰시키려는 일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재호 저 한국사의 비정 인용)
문제의 이 일을 계기로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최영희)에서 이를 구명하기 위하여
특별위원회(이선근등 15명)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
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 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결단코 매몰될 수가 없는 일이므로, 이러한 국사 편찬위
원회의 성급한 결정에 이가원등 학계일부에서는 즉각 파사현정의 기치를 높이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이론자측에서도 몇몇 동조자가 있어 찬반 양론이 신문지
상에 몇 차례 거듭 발표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중 198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는 다시 " 사육신의 묘역에 김문기의 허장을 봉안하고, 유응부의 묘도 현상 그대
로 존치하라" 는 결정을 내려 사육신공원에 사7신의 묘소와 위패가 봉안되는
난맥상을 연출하였으니 온 국민의 숭앙의 표적을 상실케하고 장래의 역사교육
방향에 일대 암영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항간에서는 김문기의 후손인 당시의 중앙정부보장 김재규가
김녕김씨 가문일족의 현창을 위하여 곡학아세하는 무리와 학자들을 이용한 추잡
한 역사 날조와 왜곡이란 호된 비판이 들끓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지 사서에 없는 사6신으로 현창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의 기록에 명백한
3중신을 현창하면 될것을 무리한 수를 놓는 것을 보고 양식있는 사람들은 그의
전조를 점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러한 정론과 이론의 논의가 간헐
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이견이 조정되지 않고 따라
서 당국의 명확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일반 국민은 아직도 혼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여
사6신 정정문제는 허선도교수의 논저 "교양국사" 신사육신 비판이란 절에서
"사6신은 추강 남효은이 절의의 표본인물로서 선정 입전하고, 정조때에 국가에
서 공인 존숭되었으니, 지금에 와서 6신중의 한 분인 유응부를 김문기로 바꿀수
없으며, 그런 까닭으로 노량진의 육신묘역에는 사6신 이외의 김문기(3중신의
1인) 또는 김종서(3상신의 1인) 등을 추가 봉안하여 사7신이나 사8신의 묘역으
로 만드는 우매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상세히 논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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