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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현모 양처

鄭宇東 0 1809
현모 양처

 * 정읍사의 여주인공
행상 나간 남편의 무사 귀가를 기원하는 애절한 마음을 읊은 백제 가요
'정읍사(井邑詞)'의 여주인공은 기다림과 인고의 미학의 창시자였습니다.
이처럼 장사나간 남편의 야행침해를 걱정하는 불안 의식을 상징적으로 토로
한 것으로, 정절의 미덕을 노래하였다는 일반적 해석에 반해 조선 중종대에
조신들에 의해 이 '정읍사'가 '동동'과 함께 남녀간 음사라 하여 폐기되었다는
기록도 있고 보면 단순히 남편을 걱정하거나 정절을 노래한 것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 김유신의 어머니
김유신의 어머니는 신라국의 만명공주로서 외간 남자, 즉 당시 신라에서 항
복한 가야국의 왕자인 외간남자 김무력과 눈이 맞아 혼전에 연애로 태어난
김유신은 오늘날로 말하면 사생아로 출생하였습니다. 거기에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얼마 살지도 못하고 그가 어렸을 때 일찍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김유신의 어머니는 자기가 저질러서 만들어낸 일이라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치지라, 오직 일생의 크나큰 낙이 바로 아들을 영재교육을 시키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공주의 신분과 재력을 이용하여 어린 김유신을 영재로
키우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야말로 우리나라 영재교육의 원조라할만 합니다. 그리고 김유신은 생
위지지가 아닌 즉, 선천적으로 우수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영재교
육을 통해 길러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혈기로 천관녀 기생과 사귀는 것을 어머니가 말려 절교를 맹세했는데
타고 다니던 말이 또 기생집으로 가자 말을 목베어 죽이고 돌아간 얘기와
어머니 만명부인이 친정으로 가던 길에 배가 고파 쓰러진 늙은 거지에게
옛날의 내외법을 벗어나 자기의 젖을 물려 먹여서 목숨을 구해주고 주막에
다 돈을 주어 걸인이 건강을 되찾도록 주선하여 주었습니다.
뒤에 거지노인이 은인을 찾지 못하자 전국의 절을 찾아 다니면서 은인을
위하여 기도하였더니 어느날 문수보살이 만명부인에게 나라와 가문을 위한
큰 인물을 점지한다는 태몽을 꾸고 김유신을 낳았다고 합니다. 과연 김유신
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제일 큰 공을 세우고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 정부인 안동 장씨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安東張氏, 1598~1680)는
조선 중기의 문인, 요리 연구가로, 본명은 장계향(張桂香)입니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1551년)과 견줄만 하고
그의 한시(漢詩) 9편은 조선중엽 천재적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과 쌍벽을 이룰 정도입니다.
그녀의 덕행과 예술가로서의 자질, 부모를 공경하는 효심,
지아비를 섬기는 현부인(賢夫人)의모습, 자식을 훈육하는 훈도(訓道)등은
오늘날 위대한 어머니 상으로 추앙받을만 합니다.

그녀는 1598년 경상도 안동부에서 성리학자 장흥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정부인 인동 장씨로 알려졌는데 이는 정부인은 그녀의 작위로 사후
아들 이현일이 정2품에 오르면서 정부인에 추증되었던 것입니다. 1616년
참봉 이시명과 결혼하여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학자 이휘일과, 숙종때의 남인의 이론가의 한 사람인 갈암 이현일(李玄逸)
이 그의 아들들입니다. 1680년 사망하였으며 1690년 아들 현일의 영귀로
정부인에 추증되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으로 <음식디미방>과 <맹호도> 그리고 시 9편이 전해지고 있
습니다. 음식디미방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요리 방법을 순한글로 기록한
요리책으로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으로, 종부를 통해
서 계속 전해졌으며,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원본을 물려받을 수없고 다만
필사본을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 한석봉의 어머니
조선시대에, 명필로 이름난 한석봉이 젊은 한때에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밤낮으로 붓글씨연습을 한 결과 이제는 명필의 반열에 올랐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글씨연습하기를 게을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어머니는 한심할 뿐이었습니다. 일찌기 남편을 사별
하고 청상과부로 살아오면서 생계를 잇기 위하여 떡을 팔아서 살아온 자신
이 보기에 아들의 자만심은 단지 어리석은 치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아들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한 것이 불을 끄고서 한 모자간의 내기입
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아들은 붓글씨를 쓰고, 어머니는 가래떡을 썰고서
그 결과를 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불을 끄고 내기를 한 결과는 참담하였습니다. 아들의 완패였습니다.
어머니가 쓴 가래떡은 그 굵기가 모두 같았음에 비하여 아들이 쓴 글씨는 뒤
죽박죽으로 어떤 글씨는 굵고, 어떤 글씨는 작고 상하좌우의 균형이 어느 하
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이 내기에서 크게 깨달은 한석봉은 그 다음날 보따리
를 싸서 집을 떠나 다시새롭게 수련에 정진하였습니다. 그결과 마침내 조선
제일의 명필이 되었습니다.

 * 사임당 신씨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1504~1551)또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었습니다.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
감 제작에도 능했습니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주나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에서 사임당(師任堂)으로 아호를
정하였습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본명은 인선(仁善)입니다.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
들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는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생전에도 부덕과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존경받았고,
사후에도 아들 율곡 이이의 정치적, 학문적 대성으로 존경하는 어머니상의
전형으로 길이 추앙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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