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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책사 에피소드

鄭宇東 0 1626
중국 책사 에피소드
 
 * 강태공
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으로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습니다.
본명은 강상(姜尙)이며 별칭은 강태공, 여상(呂尙)이라고 합니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고, 태공망이
라고 불렀지만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나라 문왕(文王)
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나라 주왕(紂
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습니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합니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주나라 문왕이 됨)을 만났습니다.
서백은 노인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
고 주나라 재상으로 등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를 태공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나라 무왕의 선군인 태공(太公)이 바랐던(望)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강태공에 대한 전기는 대부분이 전설적이지만, 전국시
대부터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주가 회자되기도 하였습
니다. 병서(兵書) <육도(六韜)>(6권)은 그의 저서라고 합니다. 

 * 자방 장량
자는 자방(子房)이며 한(漢) 고조(高祖)의 명신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졌으
나 만년에는 선유(仙遊)하였습니다.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데 공이
컸었던 한나라 3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집안이 5대에 걸쳐 한(韓)나라에서
벼슬하다가 한나라가 멸망하매, 그 원수를 갚고자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
에서 철퇴로 쳤으나 잘못하여 두번 째 수레를 부수었습니다.
재빨리 그곳에서 도망쳐 나간 그는 하비에 숨었다가 황석공을 만나 태공망
의 병서육도삼략을 얻었는데, 때마침 한고조가 일어나므로 이를 도와 병법
을 익히고, 많은 책모로써 천하를 통일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만년에는 인
간사를 다 떨쳐버리고 선인 적송자를 따라 선계로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 소진과 장의
중국의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외교전략이 합종연횡책 입니다.
합종책은 강대국에 대항하는 약소국들의 엽합동맹 체제입니다. 반면
연횡책은 강대국이 약소국과 일대일 개별동맹을 체결해서 연합체가 발흥
하는 것을 방지하며 각개격파해 가는 책략입니다.

 * 여불위 상앙 이사
여불위(呂不韋 ?~ BC 235)는 河南 푸양(濮陽) 사람으로 중국 전국시대 말
기 진(秦)나라의 정치가입니다. 중국 북서부의 많은 인접 국가들 사이에 끼
어 있던 진은 그의 유능한 외교 능력 때문에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
국 통일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원래 상인 출신이었던 그는 막대한재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진의 왕자들
중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자초(子楚)와 결탁하여 그의 첩 중 1명과
자초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그는 이미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돌던 그 첩을 자초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安國君 :
孝文王)과 화양부인(華陽夫人)의 환심을 사 자초가 태자(太子)로 책봉되도
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BC 250년 장양왕(莊襄王)으로 즉위한 자초는 그를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습니다. 여불위는 장양왕이
죽고 자기 첩의 아들 영정(贏政)이 BC 246년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도 직책
을 사임하지 않았습니다.

BC 238년 어린 황제에 대한 반역 음모에 말려든 그는 파면당하여 자신의
봉지인 허난으로 돌아갔다. 그후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촉(蜀 : 지금
의 四川省) 지방으로 쫓아버리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여불위는 승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학문을 집
대성한 책을 만들게 했다. 그결과 최초로 정리되어 나온 방대한 내용의
<여씨춘추 呂氏春秋>는 제자 백가의 학설뿐만 아니라 민간전설· 민간요법·
도교 등에 관한 개론서입니다.
 
 * 한신의 배수진
江蘇省 회음현(淮陰縣)에서 출생하였으나 출생일과 그의 집안에 관한 내력
은 분명하지 않으며 진(秦)나라 때 사람이다. 어려서 매우 가난했으며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신을 거렁뱅이에 무능
력한 인물로 취급했습니다.

한신이 불우하던 젊은 시절에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市井) 무뢰배의 가랑
이 밑을 태연히 기어나갔다는 일화로 과하지욕(誇下之辱)이라는 고사가
생겨 날 정도로 한신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입니다. 진나라 말 나라의 국운
이 기울면서 난세가 되자 항우(項羽)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한신은 이에 가
담하였으나 한신이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요직에 중용되지 못했고 한
직으로 전전했습니다. 이런 이유 뿐만아니라 항우의 성품이 거만하여 항우
를 떠나 유방(劉邦)의 진영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방의 휘하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한신이 한나라 진영에서
달아나자 소하가 다시 데려와 유방에게 천거하였고 파격적으로 삼군총사
령관인 대장군에 임명하였습니다. 한신은 해하의 결전에 이르기까지 유방
의 군사를 지휘하여 한(韓), 위(魏) 등 제국(諸國)의 군세를 격파하였습니
다. 특히 조(趙)나라와의 싸움에서 한신은 불과 2만의 군사로 배수진을
치고 그 10배인 조나라를 제압했으며 한신은 이어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제나라 왕이 되었습니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한(漢)나라의 황제로 등극하자 한신의
병권을 빼앗고 초(楚)나라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초나라 왕은 병권이 없
고 제왕으로 명분만 있는 자리였습니다. 한신은 고향인 초나라 왕으로 금의
환향하면서 예전 자신이 불우한 시절에 밥을 먹여준 표씨 여인에게 천금으
로 은혜를 갚았는데 이를 두고 일반천금(一飯千金, 일반지은)이라는 고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랭이 밑으로 기어가게 한 무뢰배에게는 치안
을 담당하는 중위(中尉)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일로 한신은 초나라에서 덕망
이 높고 고매한 인품을 가진 왕으로 칭송되었습니다.

그러나 한제국(漢帝國)의 권력이 확립되자 유방과 참모들의 견제를 받았다.
유방이 황제로서 제후국을 순회하며 초나라를 방문하자 한신은 유방을 안심
시키고자 자신에게 의탁해온 종리매(鐘離昧)의 목을 베어 유방에게 바쳤습
니다. 종리매는 항우 휘하의 장수로 유방의 진영을 괴롭혔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일은 오히려 한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민심을 잃었고 유방은
한신을 모반죄로 체포하여 장안(長安)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이때 한신은 유방을 원망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BC 201년 장안으로 압송되어 그의 신분은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었습니
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던 한신은 BC 196년 진희(陳豨)가 일으킨 반란
에 가담하였다가 탄로나자 유방의 부인 여후(呂后)와 승상 소하의 부하에
게 생포되어 참살당하였습니다.

 * 관중과 안영
管仲(BC 685~645)과 晏嬰(BC 556~500) 이 두 사람은 춘추시대 100년의
시차를 두고 齊나라를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든 명재상들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인품과 성격은 달랐지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탁월한 공적
을 세운 재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관중이 이기적이고 사치한 반면에 안영은 공정하고 검소하였습니다.
관중은 포숙아와 더불어 관포지교의 일방으로, 장사하여 이익을 나눌때 관
중이 많이 가져갔습니다. 포숙아는 그가 부양가족이 많다고 감싸주었습니다.
안영은 밥상에 고기를 두 가지 이상 차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의 처와 첩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들과 생활수준을 같게 하였습니다.
 
 * 제갈량(諸葛亮, 181~234)
중국 촉한(蜀漢)의 정치가로 181년 山東省 양도(陽都)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는 제갈량은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세력이 미약했던 유비(劉備)가 제갈량의 지혜
가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은거하고 있던 초막으로 3번씩이나 찾아
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탁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三顧草廬라고 합니다.
그는 유비가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촉한을 창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
니다. 기계제작과 수리에 능했던 제갈량은 한꺼번에 여러 대의 화살이 발사
되는 활을 발명했고 일련의 전술법인 팔진법(八陣法)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 손자와 손빈
손자는 손무(孫武) 또는 손무의 후예 손빈(孫臏)에 대한 경칭입니다.
손무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입니다.
일찍이 <병법> 13편을 오왕(吳王) 합려(闔閭)에게 보이고 그의 장군이 되었
으며, 대군을 이끌고 초(楚)나라를 무찔렀습니다. 군대를 중시했으며 "적과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百戰不殆)고 주장했습니다.
즉 적과 나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의 많고 적음, 강약(强弱)·허실(虛實)·공
수(攻守)·진퇴(進退) 등의 형세를 잘 분석하여 적을 제압하면 승리를 얻는다
는것입니다. 또한 전략전술을 활발하게 운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 최초의 병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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