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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공주의 이름이 왜 許黃玉인가?

鄭宇東 0 2528
인도공주의 이름이 왜 許黃玉인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인도 아유타국 (삘리 라뜨나) 공주가 멀리 배를 타고 김해로 와서
금관가야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녀의 이름이 한자로 쓴 허황옥(許黃玉, AD 33~189)인지 오랫동안의
의문이었습니다. 허황후 普州太后의 도래는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수많은
논쟁과 논란을 일으킨 우리고대사의 최대 수수께끼 중의 하나입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 여자입니다. 당시 인도에는 카스트라하여 브라만, 크샤
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라는  4성계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에
는 인간 평등의 정신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교리를 들고 일어선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은 결국 왕의 미움을 받아 인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
서 지금의 중국 사천성의 보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 허씨집성촌의 "許"
는 姓이 아니고 巫師신분:종교지도자를 나타내는 말로 써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대승 불교의 북방 전래설입니다. 그곳에서 허황옥이라
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이래서 인도공주 이름이 왜 허황옥인가? 하는 의문
은 풀어집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인도에서처럼 같은 인간평등 교리를 펴
다가 쫓겨나게 되고 지금의 김해라는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이것
이 바로 소승불교의 남방전래설입니다. 이때 허황옥은 불교경전과 파사석탑
등 불구를 가져 왔으므로 김해불교는 AD 50년경에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셈이 됩니다.

그 곳에서 허황옥은 김수로 왕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아들 열명을 얻습니다.
훗날 아들들은 성장해서 왕위 다툼에 휘말리게 되고 장자 거등이 왕이 되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성을 허씨로 개명하게 됩니다. 넷째 왕자는 외삼촌을 따
라 중이 되고 나머지 네 왕자는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둘째와 셋째
가 성을 허씨로 바꾸어서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하여 김해 김씨와 허씨는
뿌리가 같은 혈족으로 그들간에는 서로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허황후 도래신화는 일종의 혼인설화입니다.
혼인에 의하여 두 세력이 결합하여 제3세력에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입니다.
가야의 철기문화와 인도의 벼농사문화의 교류를 상정할수 있습니다.
허황후의 수로왕과의 결혼은 국제결혼의 효시이자
오늘날의 대세인 연상녀와의 결혼풍속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무늬(雙魚紋)는 아유타국의 문장이라 하며
가야라는 국호도 물고기를 의미하는 인도 드라비다어라고 합니다.
그 밖에 벼 쌀 등 곡물명과 호미 낫 가래등의 농기구 이름에도 인도어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허황후의 오빠 허장유화상 보옥선사의 입국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불교
의 전래시기도 지금까지 알려져온 것보다 훨씬 앞당겨져야 한다고 합니다.
김해에 있는 장유사와 지명 장유면은 보옥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일설에서는 위의 고기문양을 기독교의 물고기무늬로 비정하여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기화로 기독교의 조기전래설을 주장하는데
그 유적으로 유일하게 히브리 문자가 새겨진 경북 영주의 사도 도마의 석
상과 경주 불국사의 돌십자가 등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허황후는 10남매 중의 2아들을 자기의 허씨성을 따르게 하므로써 고대에
매우 앞선 여권적 또는 양성평등적 성인지를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기원과 문화적 유래에 대해서
自生說과 北方由來說과 南方由來說이 공존한다는 설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북방유래설로 연구 규명하려함에는 한계에 부딪쳐 심지어
자생설까지 대두되는 마당에 남방유래설을 가미할때 기존설의 헛점이 많이
보충되고 규명됩니다. 바로 이 허황후 도래설은 이러한 남방유래설의 유력
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 문화의 많은 부분은이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것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좀 더 많은 예를 들어보면,

 (1) 신앙과 종교
우리민족의 무속신앙(샤마니즘)은 북방의 엑스타시(탈혼)보다는
동남아의 포제션(빙의)에 더 가깝습니다.
 (2) 농경 문화
쌀, 호미, 낫, 도리깨 등 남방의 것과 같습니다. 또한 가축으로는 돼지, 닭,
하마 등 모두 남방 혹은 서방의 것이 대부분입니다.
 (3) 음식 문화
김치(인도, 독일), 젓갈(태국, 라오스, 인도네시아), 장아찌(태국, 베트남),
묵(태국, 베트남), 막걸리(라오스, 베트남), 된장·고추장(태국) 등 우리의
주요한 음식은 대부분 동남아의 것과 유사합니다.

 (4) 전설과 신화
또<삼국 유사>에 나오는 김수로 왕비 허황후(인도), 신라 경문왕의
당나귀의 귀(그리스), 나무꾼과 선녀(인도네시아)의 전설 등도
우리 민족의 남방과 서방의 관련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5) 놀이문화
비석치기(동남아 일대), 자치기(베트남, 라오스), 꼬누(베트남), 구슬치
(캄보디아), 닭싸움(동남아 일대), 소싸움(중국 서남부, 인도네시아),
대젓갈 놀이(베트남) 등이 동남아의 것과 같습니다.
 (6) 기타의 습속
애기 업기(태국, 미얀마), 빨래 방망이질(미얀마, 인도), 머리에 물건 이기
(인도네시아, 인도), 성황당(오끼나와, 인도) 등 우리 민족 고유의 풍속
대부분이 남방의 것과 일치합니다.

우리말과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말
과 문화의 기층이 동남아, 서남아 및 중동 지방과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합
니다. 그러나 몇 개의 어휘, 풍속과 신체적으로 몽골 반점 등의 북방적 요소
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우리 민족의 핵을 이룬 일단의 집단이 소아
시아로부터 인도 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한 다음 끊임없이 한반도로 이
주해 온 중국의 한족과 북방의 알타이어족의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기원 전 3세기 경 춘추 전국 시대의 한족의 대량 유입, 그리고 고려 말
장기간의 몽고 침입과  일본의 임진왜란에 의한 인종과 문화의 동화 현상은
비록 들추고 싶지 않은 민족적 치부라 할지라도 역사를 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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