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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商人 호설암

鄭宇東 0 1607
중국 商人 호설암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중국의 진짜 장사꾼 호설암(胡雪巖, 후쉐얜, 1823~1885)은
청나라 말기에 휘주(徽州)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집에 태어나 이름은 광용이
고 자가 설암입니다. 워낙 가난하여 따로 공부할 수 없었던 그는 읽고 쓰는
정도만 그의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12세 무렵에 아버지가 죽은 후, 호설암은
홀어머니와 고향을 떠나 저장성(절강성) 항저우(항주)에 있는 신호전장에
견습사환으로 들어갔습니다. 전장은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근대적 은
행의 전신으로 19세기 말 무렵에는 예금, 대부, 환어음 등을 다루는 거의
은행에 가까운 사설 금융 기관이었다. 그후 금융업과 외국무역으로 크게
성공하여 청나라 상계는 물론 조정의 정사까지 좌지우지 하는 거상이 되었
습니다. 휘상(徽商)으로 엄청난 부를 소유했으며, 호설암 그만이 대신급인
'1품 홍정상인(紅頂商人)'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호설암은 근대 중국 상업사에서
살아서는 활재(活財), 죽어서는 상성(商聖)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설암의 제국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항주에 그 어머니의 조언
으로 호경여당(胡慶餘堂)이란 약방을 내어 빈민 구호와 치료에 힘써 온
이 약방 하나만 남았을 뿐입니다.

중국 항주에 있는 호설암 고가에는 청나라 황제가 직접 써 줬다는 현판이
있습니다. 선량한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보면 착할 선(善)자의 아랫부분에 두 획이 없다고 합니다. 
황제는 호설암에게 착한 것은 완성되지 않았고, 끝이 없기 때문에 이를 행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되지 않은 ‘선’자를 액자로 선물했던 것입니다. 호설암 역시 이
뜻을 충분히 이해하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축적한 부로 빈민을 구
제하고 약한 사람을 돕는 등 지금으로 치면 사회공헌 활동을 여러 분야에
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호설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淸朝 광서 9년(1883년), 호설암은 경영실패로, 전장이 도산하고, 집안재산
을 모조리 잃습니다.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도원의 관직도 삭탈당합
니다. 그후 1년여만에 그는 우울하게 죽습니다. 그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그의 가족을 위하여 항주저택의 별채를 사주어 약방을 차려 생계를 꾸린것
이 지금의 항주 호경여당 약방의 시작이라 합니다.
 
전쟁터에는 항상 이기는 장군이 없습니다. 장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불패의
상인은 없습니다. 호설암의 파산은 당시의 사회환경 및 문화전통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만 만일 호설암이 거안사위하고, 수신제가했다면, 그리고 "화
복상의(禍福相依)"라는 교훈을 알았다면, 졸부심리를 극복하고, 부귀해도
황음하지 않고, 돈을 버는데도 상술(商術)을 멀리하고 상도(商道)를 지켰
더라면, 아마도 그렇게 참담하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호설암은 우리나라의 거상 임상옥 보다야 나은 편입니다.
임상옥은 그의 무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족적-흔적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데 호설암에게는 중국건축사에 길이 빛나는 그의 크고 화려한 항주고거와
인명을 구제하는 약방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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