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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천안 관음보살

鄭宇東 0 1940
천수 천안 관음보살

자비의 화신 관음보살은 천수천안으로 완성미를 실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대중大衆들은 그것이 안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500명을 모으면 千手-千眼이 됩니다. 500명 단위로 한 조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마다 두 손과 두 눈 있으니까 천수-천안의 완벽한 관세음보살
(觀世音菩薩)이 됩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에게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은
무엇때문에 필요할까요? 햇살이 들지않는 음양지의 곳곳을 살펴 도움이
필요한 데마다 구원의 손길을 건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500명이 전부 봉사활동을 하면 그대로 그 단체는 완전한<千手千眼>관세음
보살이라고 이렇게 믿은 겁니다. 이러한 비젼으로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하
여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를 만들어 사업을 벌인 분이
대만의 증엄(證嚴:쩡이옌) 스님입니다. 스님은 물에 빠진 사람은 우선 건져
내야 되고, 불에 타는 사람은 일단 불에서 건저 줘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일단 먹고 살게 해줘야 하고, 헐벗은 사람에게는 일단 옷을 줘야 되고, 병마
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일단 병을 낫게 하는 것이 급한 일이지,
불교나 어떤 종교하고도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대자대비 관세음보살(大慈大悲 觀世音菩薩)의 자비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 스님은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교회까지 지어준 사람입니다. 이것은
여기 경전經典에 있는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증엄證嚴 스님만은 할 수 있었습니다.
 
저 어디에 교인들이 교회敎會가 없어서 예배를 못 올리고 있을 때 교회를 지
어줬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經典속의 관세음보살은 못 따라 갑니다.
증엄 스님의 자비에는 뭐 불교인이다. 기독교인이다. 이런 것을 떠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중생이 필요로 하다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보천삼무(普天三無)를 설파했습니다.
- 온 천하에 내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普天之下 沒有我不愛的人>
- 온 천하에 내가 믿어보지 못할 사람은 없다. <普天之下 沒有我不信任的人>
- 온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普天之下 沒有我不原諒的人>
여기에 뭐 기독교인이다. 불교인이다. 무슨 이슬람이다. 란 구분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 같이 소인들의 알량한 계산법이지 
증엄 스님 같이, 저 하늘처럼 무한 자비심에는 그것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세계 어느 지역에 재난이 일어나더라도 쩡이옌스님의 신도회 자제공덕회
(慈濟功德會) 회원들이 제일먼저 도착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틀이나
사흘 있으면 나라에서 오기시작 한다는 겁니다.
저기 쓰촨성四川省 지진에도 그랬고, 대만 지진 때도 그랬고, 사스<SARS
급성호흡기증후군>때도 그랬고, 북한에도 역시 그랬고 해일(海溢)이 일어
났을 때도 그랬고, 9.11사태<September 11 Attacks>에도 제일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현지에 그 엄청 많은 회원들이 있으니까요.
세계 각국에 현재 5백만명의 회원이면 회원 500명을 1조로 하면 1만명의
관세음보살이 있는 셈이니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 하겠습니다.
 
2001. 9.11사태 현장에 제일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었다니까요.
그런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불교다. 무슨 불교 식구다 라는 
그런 차원을 넘어섰습니다. 소인들이 마냥 분별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우선이지요. 사람의 소중所重함을 아는 사람이니까요. 사람이
전부 다 부처님이라고 했으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고통 받는데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런 것이 보살(菩提薩陀: Bodhisattva)
이며ㆍ인간부처(佛陀:Buddha)입니다.

이러한 배경과 생각을 전제하고 보는
연극의 무용이나 영화의 영상이나 사진작품의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더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성스럽습니다. 천개의 손이 사방으로 구제를 펼
쳐 전개하는 천변만화의 아름다운 그림과 천개의 눈으로 빠진곳 없이 구
제하려는 용의주도하고 갸륵한 정성이야 말로 佛陀覺者가 못 되어도 중
생을 먼저 제도하기를 서원한 菩薩行者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에는 이 세
상 무엇에 비길 것이라고는 다시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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