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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 대감의 당공문답

鄭宇東 0 1382
孟 대감의 당공문답

고려말과 조선초에 살았고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정승 맹사성(孟思誠, 1380~1438)은 호가 옛부처 즉 고불(古佛)입니다.
맹희도라는 분의 아들로 제일 알기 쉽기로는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입니다.

고불은 고향인 아산 신창을 자주 오갔는데
그때마다 요란하게 행차를 하지 않고 조촐한 시골 노인 모습으로 검은 소를
타고 다녔습니다. 본시 검은 소는 고불이 고향에 갔다가 아이들에 의해 괴로
움을 당하는 흑소를 보고 아이들을 달래 보내고 나니 소가 따라와서 하는 수
없이 기르게 된것인데 이 소는 고불이 나중에 돌아가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
라서 죽었다고도 합니다. 혹여라도 지나는 고장의 관원이 그를 알고 상다리
가 휘어지도록 음식을 차려 내 놓으면 나는 그저 삼색 나물이면 되는것을 이
러지 마시요 하고 간곡히 사양하였다고도 합니다.

또 행랑채를 크게 짓던 어느 판서가 고불의 집에 다니러 왔다가
마침 비가 오시는 날 방에 앉아 이야기하다 비가 새어 옷을 버리고는 집에
돌아가 행랑채를 짓고 있던 공사를 중단하게 하니 그 연유를 묻는 가족에게
좌의정을 지낸 맹고불 대감댁도 비가 샐 정도인데 내가 어찌 행랑채를 지을
수 있는가 싶어서였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어느 날 고불이 고향을 다녀 한양에 가다가
주막에 하루 머물게 되었는데 한방에 먼저 와있던 선비와 수인사 끝에
말이 끝나는 자리에 공과 당을 넣어서 말하는 공당문답이 있게 되었습니다.
두사람의 문답은 이러했답니다.
ㅡ 어디로 가는공
ㅡ 한양에 간당
ㅡ 무슨 일로 가는공
ㅡ 벼슬자리 하나 얻으러 간당
ㅡ 내가 하나 얻어 줄공
ㅡ 아마 안될거당

이런 정도로 문답이 오고 간 끝에 서로 작별한 선비가 나중에 낮은 미관
말직이라도 하나 얻어 관직에 오르게 되었을 때 인사를 하러 등청을 하
고 보니 웃자리에 앉은 고관들 가운데 한사람이
ㅡ 그동안 잘 지냈는공 하니
선비가 그제사 하늘같은 좌의정과 공당문답을 하였던 것을 알아 차리고
ㅡ 죽을 죄를 지었습니당 하는 말로 공당 문답이 마쳐졌다고 전합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승댁 부녀자들이 봄나들이를 가는데
황희 정승의 부인은 무명옷에 기운 옷을 입고 일행과 같이 하니 다들 말
은 안해도 속으로 혀를 끌끌 찹니다. 더우기 점심을 먹을 때가 되어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펼치는데 보니 다들 산해진미로 가득한 상을 펴는데
황희 정승의 부인 상에는 보리밥과 싱거운 나물 무침이 전부이니
또 한번 여러 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습니다. 이때 조금 늦게 일행에
합류한 고불 맹사성의 부인이 상황을 파악하고
“어디서 감히! 나라의 녹을 먹는 정승의 부인으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황희 정승과 그 부인을 욕되게 하느냐? 그대들이 입고 있는 비단
옷과 차려놓은 기름진 음식들이 바로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피와 땀
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호통을 치니 대부분 사과를 하였고
두 대감의 부인은 보리밥에 나물 무침을 맛나게 먹더라는 이야기도 전해
져 옵니다.
 
맹사성대감이 그렇게 청렴하였던 뒤에는
최영장군의 손녀였던 고불 못지 않은 그 부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청렴한 모범인 황희 정승의 뒤에도 이런 현모량처
아내의 내조가 컸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사족을 하나 붙입니다.
맹대감의 당공문답에는 어쩐지 훈민정음 창제시의 28字중
"꼭지 없는 ㅇ" 과 "꼭지 있는 (ㅣ) +ㅇ" "관있는(ㅡ) +ㅇ" 을 구별하여 쓴
당시의 용례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창제 당시에는
초성, 중성, 종성을 엄격히 갖추어 글씨를 네모안에 꽉 차게 쓰도록 하였으
므로 원래의 음가(소리값) 없는 "이응" 을 써서 당=>다로 발음하고 ,
공=>고인 것을 음가 있는 "이응"으로 착각 오용된 사례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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