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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鄭宇東 1 1644
단원 김홍도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는
영-정조의 문예부흥기부터 순조 연간 초기에 활동한 조선시대의 화가였
습니다.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지도를 받아 그림을 그렸고,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능하였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
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고미술사에서 거의 전설처럼 전해오는
신라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그려 새들이 실물인듯 착각하여
거기 앉으려다가 미끄러져 떨어지게 하였다는 이야기와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를 그려 일본
의 국보가 되게 한 고구려의 담징이란 뛰어난 선배화가들이 있었지만
단연코 단원의 존재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 겸재(謙齋)
정선(鄭敾),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김홍도(金弘道)는 1745년(영조 21)에 태어났습니다.
출신 가문은 원래 무반에서 중인으로 전락한 집안이라는 것만 확인되고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
니다. 다만, 그의 나이 7, 8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
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안산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인연과 연유로 해서
안산시는 단원 김홍도를 고장을 빛낸 인물로 기리며, 단원을 1구역의 지
명으로 삼았습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안산의 단원고등학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강세황은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하여 다음에는 직장에서 상하
관계로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서 강세황이 세상을 떠나는 1791년,
김홍도의 나이 47세까지 이어졌습니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습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773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습니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平)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에 대한 포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제수 받았습니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
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습니다.
이는 그가 이유방의 문사로서의 고상하고 맑으며 그림이 기묘하고 아취
가 있는 것을 사모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에 의하면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 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강세황 역시 <단원기> 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
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
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
었습니다. 김홍도는 회화에서뿐 아니라 거문고, 당비파, 생황, 퉁소 등을
연주하는 음악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일찍부터 평판이 높았던
서예가이고, 빼어난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에 고졸한 아취가 흐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멋과 문기(文氣)가 번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홍도는 179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일에 또 한 번 참여하게 되었
고, 그해 12월 포상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발령받았습니다. 이는 중인 신
분으로 그가 오를 수 있는 종6품에 해당하는 최고 직책이었습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1795년 서울로 돌아온 김홍도는 그림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나이 51세로
원숙기에 접어든 그는 이때부터 단원화풍이라고 불리는 명작들을 그려내
기 시작했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이고, <을묘년
화첩>과 <병진년 화첩>은 우리나라 진경산수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아름
다움을 유감없이 표현한 명작입니다. 김홍도는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화원다운 치밀함과 섬세함 대신 대가다운 과감한 생략과 스스럼없는 필묵
의 구사로 단원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김홍도는 산수, 인물, 도석, 불화, 화조, 초충 등 회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
났지만 특히 풍속화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조선 후기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여 길쌈, 타작, 대장
간, 고기잡이 등 그들이 생업을 꾸려가는 모습과 씨름, 무동, 윷놀이 같은
놀이를 즐기는 모습, 빨래터와 우물가, 점심 등 서민의 삶과 정서에 밀착
된 일상의 모습을 간략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풍속화
에는 박진감 넘치는 구성과 예리한 관찰, 그리고 인간적인 따뜻한 시선
이 담겨 있으며, 활달하고 건강한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묻어납니다.

단원의 중요한 작품에는
<자화상>(18세기 중반), <군선도>(1776), <서원아집도>(1778), <행려
풍속도>(1778), <단원풍속도첩>(18세기 후반), <송월도>(1779), <꽃과
나비>(1782), <단원도>(1784), <사녀도>(1784), <금강사군첩>(1788),
<연꽃과 게>(1789), <을묘년화첩>(1795), <병진년화첩>(1796), <마상
청앵도>(18세기 후반), <염불서승도>(1804), <추성부도>(1805) 등이
있습니다.
1 Comments
찬송가 2015.02.24 11:48  
미술전시회에 가면 꼭 있는 김흥도선생님의 작품들...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