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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형 노비 박인수

鄭宇東 0 1643
선비형 노비 박인수

박인수(朴仁壽, 1521~1592)는
정2품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지낸 신발(申撥)의 노비였습니다.
박인수는 노비였으나 막일을 하는 노비가 아니었습니다. 높은 학식과
단정한 품행으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제자들까지 거느렸습니다.
박인수는 학식을 쌓고 선비 이상의 몸가짐을 유지한 노비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민담집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그에 관
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한 글에서처럼 “노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공업·상업·
병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노비는 학문을 연구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노비들은 그런 직업밖에 가질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국법상으로 노비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업·
공업·상업·병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인수는 천한 일을 버리고 학문에 힘
쓰면서 선행을 좋아했습니다. 읽은 책은 대학 소학 근사록(近思錄) 같은
것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행실이 탁월했고 예법에 맞지 않
으면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박인수는 일반적인 노비의 길을 거부하고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그를 학문의 길로 이끈 사람은 박지화(朴枝華)란 학자였습니다. 박지화는
대학자인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명종 때 당대 최고의 학자로 손꼽혔습
니다. 박인수는 유학만 배운 게 아니었습니다. 한때는 불경에 심취해서 승
려가 되려고 했습니다. 유교와 불교를 두루 공부했으니, 누구와 대화해도
막힘이 없었을 것입니다. 방 안에 거문고를 두고 즐길 정도로 취미도 제법
고상했던듯 합니다.

노비 주제에 그렇게 한다고 남들이 알아주기나 했을까? 비웃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그의 학문은 남들이 ‘알아줄’ 정도였
습니다. 수많은 선비들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습니다. 제자들은 박인
수에게 죽을 올린 뒤, 그가 다 먹은 다음에야 물러갔습니다. 그가 선비 중심
의 사회에서 얼마나 탄탄한 지위를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노비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정
도였으니 박인수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노비주(奴婢主) 신발도 그를 쉽게 대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박인수가 주인집에 기거한 솔거노비였는지 아니면 주거를 따로 한 외거노비
였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생 노비 신분을 유지하며 공
부에 전념한 것을 보면 외거노비였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학문적 명성을 쌓
기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군가가 그를 위해 희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
는 중에도 그가 노비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
다. 외거노비의 중요한 의무는 노비주에게 정기적으로 신공(身貢), 즉 공물
을 바치는 것입니다. 제자가 생기기 전에는 가족들이 대신해서 신공을 바쳤
을 것이고, 제자가 생긴 후에는 거기서 생긴 수입으로 박인수 스스로 신공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노비를 거느린 노비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시기심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박인수의 주인은 그렇
지 않았습니다. 박인수는 주인집과 꽤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어우야담"
에서는 그가 신발의 아들인 신응구(申應榘)와 함께 개골산(금강산)에서 책
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박인수는 그냥 학문이 좋아서였지만, 신응구는 과거
시험을 목표로 금강산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수험생’인 아들을 노비에게 맡
긴 것을 보면, 신발이 박인수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인수가 당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인집과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박인수가 좀더 쉽게 선비 사회로 진
입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면천(免賤)을 시켜주지 않았다면, 일개 노비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면천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박인수 같은 인물이 면천되었다면, 그 이야기도 분명히 전하겠
지만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노비 신분으로 학문 활동을 하는 박인수의 모습뿐입니다.

선비형(型) 노비 박인수는 우리를 의아하게 만듭니다.
노비가 글을 좋아하고 거문고를 타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노비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박인수를 떠받든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良人)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박인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노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역사적 실제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노비에 관해 잘못 아는게 많기 때문에 박인수란 존재를 납득하기 힘든 것
입니다. 노비가 정확히 어떤 존재였는지를 탐구하면, 박인수가 노비 신분
을 갖고 선비 사회에서 존경을 받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선사회의 신분은 우리가 흔히 오해했듯
(1) 양반과 천민은 법적으로 나눈 태생적인 신분의 분류이며
(2) 士農工商은 종사하는 직업의 종류로 나눈 신분입니다.
따라서 (1)과 (2)는 별개의 기둥으로 교차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양천 구분과 사농공상 구분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인이 사농공상
에 속할 수도 있었고 천민, 즉 노비가 사농공상에 속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천민이면서 학문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일도 가능합니다.
대표적인 박인수 이외에도 천민 출신의 선비 사례가 많습니다.
백대붕보다 몇 살 위인유희경(劉希慶, 1545~1636)도 천민 시인이었습
니다. 백대붕이나 유 희경 외에도 천민 시인들이 많이 활동했다는 점은
백대붕이 결성한 시인 모임인 풍월향도(風月香徒)에 천민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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