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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鄭宇東 0 1362
명성황후 시해사건

민비는 조선 말기 임금인 고종의 비로 명성황후를 가리킵니다.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
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6세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에 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完和
君)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습
니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여 민비는 대원군의 반대파 세력을 규합
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습니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
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 을 동부승지로 발탁
하고, 대원군의 실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
좌에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1873). 고종에게 親政을 선포하게 함과 동
시에 민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축한 뒤,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습니다(1876).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
여 민씨 세력이 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
(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하였습니다.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습니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
되었습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
政變)을 일으키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통하여 청군이 개입하도록 함으로
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점차 정권을 좌우하
고, 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
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
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
고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습니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습니다. 이것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합니다.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
었고, 1897년(광무 1)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습니다.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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