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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과 대불호텔

鄭宇東 0 1799
손탁호텔과 대불호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1902년(고종 39) 프랑스 태생의 독일 여성 손탁(Sontag)이 건립했으며,
우리나라의 개항기에 세계 열강 외교관들의 외교무대의 각축장이 되었고
또한 우리나라에서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호텔의 어원은 심신을 회복한다는 뜻의 라틴어 호스피탈레에서 유래했는
데, 호스피탈(hospital)·호스텔(hostel)·인(inn)·호텔(hotel)의 변천을 거쳤
습니다. 호텔의 손님은 'customer'가 아닌 'guest' 입니다. 이것은 이용료
를 비싸게 받고 대신 최고의 예우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손탁(Antoinette Sontag, 孫澤, 孫鐸, 宋多奇; 1854~1925)은
1885년 초대 한국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Veber)와 함께
서울에 와서 베베르 부부의 추천으로 궁궐에 들어가 양식 조리와 외빈 접
대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다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배후에서
활약하다가 1895년 고종으로부터 정동(貞洞)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외
국인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1902년 10월에는 이 가옥을 헐고
2층의 서양식 호텔을 지었는데, 이 호텔이 바로 손탁호텔입니다.

흔히 이곳을 일컬어 서울에 건립된 최초의 서양인호텔이라는 얘기도 있으
나, 손탁호텔에 앞서 정거장호텔(서대문역 앞)과 프렌치 빨레호텔(대안문
앞)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h)의 꼬레호텔(Hetel de Coree)
등과 미대사관의 숙소까지 있었으므로, 이 대목은 사실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설령 최초의 서양인호텔은 아닐지라도 근대사의 전개에 있
어서 그 존재의미는 남 다른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개항지 인천항은 1883년 개항과 함께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근
대식 숙박 시설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가
1887~1888년 인천 중앙동에 그리스풍의 대불(大佛)호텔을 일찍이 세웠
고,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제일 먼저 판매하면서 서양인들의 높은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자 극심한 불황을 겪으면서
중국인에게 팔렸는데 새 주인은 건물을 개조해 중화루(中華樓)란 요릿집
으로 용도를 변경했습니다. 이 호텔과 맞은편에 청국인 이태(怡泰)가 개
관한 스튜워드 호텔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대불호텔에게 우리나
라 호텔의 시초라는 칭호를 돌려 주어야 마땅합니다.
 
1909년 손탁이 프랑스로 귀국하자
1918년 문을 닫은 뒤 이화학당에서 사들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3년
호텔을 헐고 새 건물 프라이홀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폭격을
당해 폐허로 남아 있다가 1969년 3층짜리 호텔로 지어져 이후 여관과 식
당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지금의 정동교회와 정동극장 뒤에서 경향신문사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호텔의 터가 남아 있습니다.

근대사의 격랑에 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인의 말로는 더욱 극적
입니다. 일본인 키쿠치 켄조(菊池謙讓)는 <조선잡기> (1931)라는 책에
"1909년 9월, 손탁양은 조선을 물러났다. 그의 친구는 거의 돌아갔고,
그의 우방은 패전하여 조선에서 구축(驅逐)되었다. 그녀가 조선에 왔을
때는 30세의 단려한 꽃과 같은 미모를 지녔으나, 그 떠남에 있어서 훤하
던 풍협(豊頰)과 빛나던 완용(婉容)은 파란 많은 조선의 30년사를 짊어
진 듯, 그 두둑해진 돈주머니의 무게보다도, 내동댕이쳐진 경성(京城)의
풍파(風波)에 의해 쫓겨나는 것처럼 돌아갔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자마
자 명승(名勝) 지구인 칸에 청상(淸爽)한 별장(別莊)을 지었다. 이곳에
서 동방에서 벌어온 거부로 유유하게 살고 싶었지만 어떤 연유인지 저
금한 재산이 대부분 러시아은행에 맡겨졌고 러시아 혁명과 연이은 공산
정부의 수립으로 손탁은 저금도 투자도 한꺼번에 몰수(沒收)당해버렸다.
극동왕국의 말기를 목격하고, 또 극동제국의 패망을 바라보며, 그는 일
대의 영화가 꿈과 같이 말살된 채로, 1925년 러시아에서 객사(客死)하
였다. 그때 그는 71세의 노양(老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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