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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鄭宇東 0 1398
삼전도비(三田渡碑)

오늘 남한산성에 가서 삼전도비를 볼려고 생각한것은 나의 무식 때문이었
습니다. 비는 석촌 서호수에 있다는 말에 우리 문화재나 기념물이 이리 저
리 옮겨 다니는 신세를 이해하기에 예사 남한산성에 있던 것을 어떤 연유
로 그리로 옮겼나 싶어 인터넽을 살펴보니 애시 당초에는 삼전동이었고
근래 2010년에 새로 옮긴 자리가 석촌 서호 롯데호텔 건너편이었습니다.

이 비는 비신높이 395㎝, 너비 140㎝이고 사적 제101호입니다.
1639년(인조 17)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입니다.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큰
비입니다. 비양(碑陽)에는 왼쪽에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에 만주문(滿洲
文)으로, 그리고 비음(碑陰)에는 漢文으로 자경 7푼의 해서로 새겼으며
비액(碑額)은 전서(篆書)로서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라고 적
혀 있습니다.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
(呂爾徵)이 전(篆)하였습니다. 이 비는 1636년 12월 청태종이 대병을 이
끌고 침공하였을 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전도 보람없이 인조가 삼전도에 나
아가 항복하는 욕을 당하여 백성의 어육(魚肉)을 면하였던 사실을 대청황
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에 담아 세우게 된 우리민족 치욕의 기록입니다.

청과의 전쟁인 병자호란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명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의 처사에 불만이다가
1627년(정묘) 후금국이, 1636년(병자) 청국이 침구하여 온 전쟁을  말
하는데, 본래 청태조가 청나라와 조선은 형제로 보고 서로가 예우(禮遇)
로써 대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청태종이 대로하여 쳐들어와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駐蹕 : 임금이 잠
시 머무름)하고 조선의 항복을 받은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한다는
강박(强迫)에 못 이겨 세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몽고문· 만주문· 한문
의 3종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이 비일뿐 아주 드문 일입니다.

이 치욕의 삼전도비는 역사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이리 저리 옮겨다니다
가 지금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편 롯데호텔의 차도 건너편에, 소나
무들 사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삼전도비가 옮겨와 있습니다.
가린다면 치부야 안 보이겠지만 치부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 굴종도 마찬 가지입니다. 오히려 굴종의 아픔을 되새겨서 와신
(臥薪)하고 상담(嘗膽)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의 마당에는 마침
일본군 대위가 그린 남한산성 도로도가 전시되어 있는데 미 의회도서관
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랍니다. 어제 어느 모임에서 본 여자 인류학자의
권유로 우리나라 유학생들에 의한 한국정통(악기)음의 원통형 녹음물도
또한 의회도서관 보관용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희귀자료는 원당사국에
반환하는 미덕쯤은 문명국들이 자발적으로 발휘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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