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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정정논쟁의 전말

鄭宇東 0 1831
사육신 정정논쟁의 전말


우리가 산수를 배울 때는 구구단을 외웠듯이, 우리가 국사를 배울 때는 이조의 왕위
세습도를 "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예 성 연 중 인 명 선, 광 인 효 현 숙 경 영,
정 순 헌 철 고 순종 " 하여 27대 순종왕까지 외웠고 이어서 또 단종복위를
꾀하다 순절한 만고충신 여섯 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사육신을 입이 닳도록 달달 외웠습니다.

그런데 1974년 국정 국사교과서 편찬 당시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1977년에는 홀연히 역사전공 학자가 아닌 구석봉의 조선일보 지상을 통한 이론제
기로 근 500년간 절의의 화신으로서 국민의 숭앙을 받아오던 조선 초기 단종조
"사육신"의 한 분인 충신 유응부의 사실이, 그 당시 동시에 사절한 삼중신의 한 분
인 김문기의 사실과 바뀌어졌다고 하면서, 유응부의 늠름한 충절을 우리 국사상에
서 호도 매몰시키려는 일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재호 저 한국사의 비정 인용)
문제의 이 일을 계기로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최영희)에서 이를 구명하기 위하여
특별위원회(이선근등 15명)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
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 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결단코 매몰될 수가 없는 일이므로, 이러한 국사 편찬위
원회의 성급한 결정에 이가원등 학계일부에서는 즉각 파사현정의 기치를 높이
들어 반론을 제기하고, 이론자측에서도 몇몇 동조자가 있어 찬반 양론이 신문지
상에 몇 차례 거듭 발표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중 198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는 다시 " 사육신의 묘역에 김문기의 허장을 봉안하고, 유응부의 묘도 현상 그대
로 존치하라" 는 결정을 내려 사육신공원에 사7신의 묘소와 위패가 봉안되는
난맥상을 연출하였으니 온 국민의 숭앙의 표적을 상실케하고 장래의 역사교육
방향에 일대 암영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항간에서는 김문기의 후손인 당시의 중앙정부보장 김재규가
김녕김씨 가문일족의 현창을 위하여 곡학아세하는 무리와 학자들을 이용한 추잡
한 역사 날조와 왜곡이란 호된 비판이 들끓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지 사서에 없는 사6신으로 현창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역사의 기록에 명백한
3중신을 현창하면 될것을 무리한 수를 놓는 것을 보고 양식있는그의 전조를 점치
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러한 정론과 이론의 논의가 간헐적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이견이 조정되지 않고 따라서 당국의 명확
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일반 국민은 아직도 혼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발단은 기록의 차이에서 있다. 世祖實錄에 의하면 유응부를 제외
하고 그 자리에 兵力 動員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가 발각 후에도 변심치
아니하고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백촌 충의공 김문기가 거론되어 있는 것이
고, 생육신의 한 분인 남효온의 六臣傳에는 김문기가 없고 유응부가 열거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 조선실록의 역대의 저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이 문제를 놓고 고심 연구끝에
정조때에 와서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하여 국내의 참고할 만한 모든 문서와
사적을 널리 고증하여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 의전인 어정배식록에서 김문기를
3중신의 한 사람으로 지정하고, 사6신과 같은 날 죽었기때문에 사6신과 함께
배향하였을 뿐입니다. 여기에서도 보듯 세조실록에 국문당하는 여섯 사람중의
한 사람인 충의공 김문기는 3중신이지 사6신이 결코 아닌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여
사6신 정정문제는 허선도교수의 논저 "교양국사" 신사육신 비판이란 절에서
"사6신은 추강 남효은이 절의의 표본인물로서 선정 입전하고, 정조때에 국가에
서 공인 존숭되었으니, 지금에 와서 6신중의 한 분인 유응부를 김문기로 바꿀수
없으며, 그런 까닭으로 노량진의 육신묘역에는 사6신 이외의 김문기(3중신의
1인) 또는 김종서(3상신의 1인) 등을 추가 봉안하여 사7신이나 사8신의 묘역으
로 만드는 우매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상세히 논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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