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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鄭宇東 0 1418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서기 1789년은 프랑스혁명의 해입니다.
이해 7월 14일 파리시민들은
음산하고 암울한 것의 대표로 낙인찍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므로서
혁명의 불길은 높게 타올랐다고 알려져있지만 바스티유 감옥의 환경은
조금도 열악하지 않았습니다. 투옥된 자들은 주로 귀족출신의 범죄자들
이었고, 비록 갇힌 몸이긴했으나 죄수들은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렸습
니다. 수비군과 봉기군의 대치와 습격과정에서 그 당시 감옥 수비대장은
민중들에게 항복했지만 몇몇 병사들과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고금의 전
장에서 지켜지던 항장에 대한 예우 따위는 안중에 없었나 봅니다.

모짜르트가 어릴때 오스트리아로 연주여행을 가서 왕궁에서 연주장으로
가다 넘어진 것을 앙투아네트가 상냥스럽게 부축해 준 인사로 그의 미래
의 신부로 점지할만큼 예의 바르고 예쁘고 총명한 마리 앙투아네트였는
데 장 자크 루소가 그의 고백록에 언급한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를 먹으
면 되지" 라는 한마디로 사치스럽고 세상물정을 모르는 세상에서 제일
경박한 왕비가 되어 두고 두고 빈축을 사고있습니다.
 
기요땡(Joseph Ignace Guillotin, 1738~1814) 해부학 교수는
고통없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기구, 즉 단두대를 활용하자는 안건
을 제출한 일은 있으나 기요땡 박사가 단두대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칼날을 떨어뜨려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는 고대 페르시아에도 있었고,
중세 독일이나 17세기 영국에서도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프랑스 의회
는 기요땡의 안건을 받아들여 기요틴(guillotine)을 제작하라 명했지만,
기요틴을 고안한 사람 역시 기요땡 박사가 아니라 독일 출신의 수공업
자 슈미트(Schmitt)였습니다. 기요틴의 첫 희생자는 펠리시에라는 노
상강도였고 이 끔찍한 처형의 발의자란 오명을 벗어나기 위하여 이후
기요텡의 자손들은 성을 갈았습니다. 

프랑스의 미식가이면서 의회의원이었던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은
고향 벨리에서 변호사가 되고 1789년 국민회의에 진출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서 법원장과 시장이 되었습니다. 독신으로 지내며 집으로 초대하여
요리하기를 즐겼습니다. 역사 고고학 미식 레스토랑에 관한 글을 썼는데
그중에 " 미식예찬"(원제 미식의 생리학)은 이 방면의 고전중의 고전입니
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우주에서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하였고 국민회의에서는 국
민들이 다 배불리, 더 좋은 음식을 먹을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하기를 촉구
한 철학자 같은 법률가였고 철학자 같은 요리사였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에서 좋은 나라는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
고 하였지만 요리사도 철학자가 되니 즐겁습니다. 이런 저런 분야의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철학자가 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이상적 사회라 하겠습
니다.

프랑스 혁명의 풍운아는 누구 누구라해도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Marie Isidore de Robespierre,1758~1794)입니다.
그는 당통(Jacques Danton), 마라(Jean-Paul Marat)와 더불어 자코뱅당
(산악파)의 3인방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여타 시민혁명과 구분되는 가장 독
특한 부분을 가장 중심적으로 이끈 사람이며 공포정치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데 가장 중심이었고, 그 전부터 자코뱅파의
집권을 가능케 한 '민중적 경향'을 앞장서서 고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형
제 폐지를 주장했다가 공포정치의 대량 처형을 주도하게 되는 등 극적인 변
화를 보여주었고 그런 양면성(내지는 다면성) 때문에 선악 판단을 쉽게 내리
기 힘들어 논쟁을 잔뜩 불러오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문헌에
그에게는 '흡혈귀' '냉혈동물' '야심가' '독재자' 등의 지독한 악명과 함께
'민주주의자' '자유와 인민의 벗' '불행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의 옹호자' 등의
찬사가 붙어 다니는 연구해 볼만한 매력있는 이중성의 인물입니다.

절대왕정, 귀족 주도의 신분제, 봉건경제의 제약 등 앙시앙레짐의 폐단으
로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혁명주체세력과 그 실천자들이 표방한 이념들이
일반국민의 바램과 너무 동떨어진 고원한 이상이었고, 그 실천에 있어서
도 경륜과 경험의 부족으로 과격한 변혁을 도모하므로써 국민들의 관심에
서 멀어졌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덕목중 인재를 잘 쓰는 지도력의 흠결은
혁명같은 대사업도 망가뜨립니다. 혁명의 기치로 모였다하더라도 추진은
점차적인 개혁으로 추진했어야 옳습니다. 그리하여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이 오히려 수구반동세력인 나폴레옹의 왕정으로 복귀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역사적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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