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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우리 영화음악의 시작

鄭宇東 1 1983
우리 영화음악의 시작

영화인협회는 박승필-김도산의 <의리적 구투>가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상영된 날을
"한국 영화의 날"로 제정, 1963년부터 매년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19년 단성사에서 상영한 최초의 연쇄극 즉, '키노드라마'입니다.
연쇄극(연쇄활동 사진극)이란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것인데, 이것은 영화라
기보다 연극에 가까웠습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기록에 의하면 1899년 한국을
여행하던 미국인 여행가 엘리아스 홈즈(Elias Burton Homes)가 고종황제 앞
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하였습니다. 이 신기한 구경의 댓가로 그는
고종황제로부터 비단과 부채등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술가들은 날라리 또는 딴따라라하여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술좌의 일각에서는 작곡가들이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반대
하고 비난하였습니다. 비교적 여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김동진 선생의
영화음악 작곡의 변은 북한에 있을때 소련의 작곡가 하차트리안이나 쇼스
타코비치가 영화 음악계에서 이룬 활약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저할 까
닭없이 영화의 음악도 작곡한다고 말했습니다.

국내에서는 1903년 "황성신문" 에 영화 광고가 실리면서 광무대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영화가 상영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어서 협률사(1908년
이인직이 설립한 원각사의 전신)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의 영화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촬영된 활동사진의 수준으로서 레코
딩된 음원이 아닌 소규모로 이루어진 몇 명의 악단원의 실제 연주가 사용
되었습니다.

1918년 서울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團成社)가 영화상설관(무성영화)으로
개편되면서,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 출신인 악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스크린뮤직밴드가 생겨났습니다. 1932년 이전까지 수입되던 무성영화에는
영화의 장면을 위한 분위기 음악악보가 따라왔습니다.
애정장면을 표현하는 슈만 작곡의<트로이메라이> 중 로맨스 1번·2번,
이별의 슬픔 또는 죽음을 암시하는 마스네 작곡의<엘레지(悲歌) 1·2번,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장면을 위하여 로시니 작곡의<윌리엄 텔 서곡>등
에서 폭풍 1·2번을 발췌한 대개는 구미(歐美)의 기성음악을 일관편성한
오케스트라용 악본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이런 음악 중에서 바흐 작곡의
<G선상의 아리아>, 생상스 작곡의<백조>, 오펜바흐 작곡의<천국과
지옥>등이 영화관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곡이었습니다.

1926년 춘사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흑백무
성 영화입니다.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 '신아리랑'도 대중적
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나운규의 이 <아리랑>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
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
화시킨 작품이었습니다.

무성영화의 시대에서 유성영화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영화음악 또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되는데, 국내에는 최초의 발성영화「춘향전」
(1935)이 홍난파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이후「처(妻)의 모습」(1939)은 동시녹음 기법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작곡가 조두남은 이 영화를 위해 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영화사상 영화를 위한 최초의 창작영화음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해 제작 편수가 100편을 넘기 힘들었던 한국영화는 1959년을 기점으
로 111편이 제작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이때 제작된 영화들의 대다수가
주제가를 가졌을 만큼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왕성한 작업이 펼쳐졌습니다.

1935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성영화시대가 되면서,
영화관의 악단원들은 순회극단·가극단·레코드사 연주단원으로 변신하였습
니다. 이런 연주인들 중에서 대중가요 작곡가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전수린(全壽麟)· 문호월(文湖月)· 김교성(金敎聲)· 김서정(金曙汀)· 박시춘
(朴是春)· 김기현(金基鉉)· 김화영(金華榮) 등이 이런 맥락을 이어온 인물들
입니다.

1935년 영화 <춘향전>은 최초의 발성영화로 녹음기사 이필우(李弼雨)의
의 솜씨였으나, 극중 대사만 발성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음악은 홍난파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창근(李昌根)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1939년에는 평양에서<처의 모습>이라는 극영화에 조두남(趙斗南) 작곡
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음악을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40년 방한준(方漢駿) 감독이 국책문화영화인<풍년송>에서 우리민요를
편곡, 안기영(安基永)이 지휘, 녹음하였습니다. 1941년 이병일(李炳 逸) 감
독 <반도의 봄>은 오케이레코드사의 스윙밴드 중심으로 가수들의 순회공
연 내용의 기록영화적인 작품이었습니다. 8·15광복 이후부터 6·25전쟁까지
기록영화·문화영화·극영화의 총 제작수는 69편입니다.

이들 영화의 음악은 대개 기성레코드음악으로 화면을 채우는 것이 고작이
었습니다. 1946년도 최인규(崔寅奎) 감독 <자유만세>(음악담당 박태현
朴泰鉉), 1947년도 <죄없는 죄인>(음악담당 임원식 林元植)도 레코드
음악이었습니다. 레코드에 의한 기성음악 선곡은 조백봉(趙白峰, 본명
조갑순 趙甲淳)이 주로 하였습니다. 영화 <흥부전>(이경선 감독) 에서
소편성의 관현악단을 동원하여 김성태(金聖泰)가 광복 후 처음 영화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1947년 음악영화 <푸른 언덕>에서 본격적으로 서울교향악단(金生麗가
조직한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전신) 50여 명을 동원하여 전편에 걸쳐
황문평(黃文平) 작곡의 창작음악을 사용하였습니다. 1948년 신경균(申
敬均) 감독 <새로운 맹세>의 음악담당 박시춘이 경음악단을 동원하여
창작곡으로 전편을 담당하였습니다.

1954년 국산영화 진흥을 위한 법적 조처로 입장세가 면세되면서 영화제
작에 활기를 띠어 수적으로 많은 극영화가 제작되면서 많은 작곡가들이
영화음악 창작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출격명령>(홍성기 洪性麒
감독)에서 베를린대학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安炳昭)가 음악을 담
당하였고, 신상옥(申相玉) 감독 <무영탑>은 나운영(羅運榮)이 작곡하였
습니다. 이른바 차원이 높은 문예작품이라는 극영화제작진들의 통념으로,
영화음악 창작은 순수음악분야의 작가들에게 위촉하는 것이 이 당시의
상례였습니다.

6·25전쟁 이후 월남한 김동진(金東振)·김대현(金大賢)을 비롯하여
김성태(金聖泰)·정회갑(鄭回甲)·정윤주(鄭潤柱) 등이 많은 작품을 썼습니
다. 1957년<청춘극장>(홍성기 감독)의 음악담당자 김동진은 대중성을
고려하여 대중가요 가수 남일해(南一海)와 송민도(宋旻道)에게 <축배의
노래>라는 주제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1958년<백치아다다>(이강천
李康天 감독)에서는 여주인공 나애심(羅 愛心)에게<백치아다다>라는
주제가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신상옥 감독 <동심초 同心草>의 음악담당 김성태는 가곡 <동심초>를
대중가요 가수 권혜경(權惠卿)에게 부르게 하였습니다. 군악대 출신 작곡
가 한상기 (韓相基:해병대 군악대장 출신)·김희조(金熙祚:육군군악대장
출신)· 전정근(田正根:공군군악대 출신) 등이 개성 있는 음악성을 발휘하
여 영화음악의 전문가로 활약하였습니다.

가요 작곡가로 오랜 경력을 지닌 박시춘은 영화음악담당에서 진일보하여
오향영화사(五響映畫社)를 창립, 극영화의 제작·감독까지 직접 하였습니다.
가요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이인권(李寅權)도 많은 멜로드라마 작품에 참
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작비 절감 또는 속성제작 등의 폐습이 만연하여 레
코드 음악으로 때우는 경우도 많아, 전체 제작편수 중에서 창작음악으로 작
품이 완성되는 비율은 50%를 조금 넘는 형편이었습니다.

또 여러 장르의 음악을 포용하는 하나의 새로운 음악매체로 그 특수성과
한국영화음악의 발전과 레코드음악(기성음악)을 추방한다는 목표 아래
한국영화음악협회(韓國映畫音樂協會)가 조직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
김성태, 부회장에 김대현(순수분야), 손목인(대중분야), 그리고 이사진에
김동진· 한상기· 김희조, 사무국장에 황문평이었습니다.

1962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조직되어 각 분야마다 유사한 장르별로
협회를 구성하도록 한 정부방침에 따라 영화음악협회는 한국영화인협회
(韓國映畫人協會) 산하로 규합되었습니다. 1961년 당시 인기가수 한명숙
(韓明淑)이 부른<노란샤쓰의 사나이가 영화로 제작되면서 영화제목값으
로 작곡가 손석우(孫夕友)에게 100만 환을 지불하는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노필 감독의 <꿈은 사라지고>에서는 남주인공 최무룡(崔戊龍)이 주제
가를, 여주인공 문정숙(文貞淑)이<나는 가야지>등을 불러 노래하는 스
타로 부상하였습니다. 연기파 배우 김승호(金勝鎬) 역시<아무리 옷이 날
개라 지만>에서 직접 주제가를 불러 인기가 높았습니다. 영화주제가의
붐이 일자 당시 최고 인기가수였던 나훈아(羅勳兒)·남진(南珍) 등이 영화
의 주인공으로 등장, 대중음악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습니다.

청춘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받고 있던 신성일(申星一)· 엄앵란 공연의
청춘영화<맨발의 청춘>에서는 이봉조(李鳳祚)가 주제가를 만들었습니
다. 1970년대 중반부터 뮤지컬작가 최창권(崔彰權)이 주목받는 영화음악
을 창작하였습니다. 영화음악은 우선 담당감독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영화
적인 감성이 초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감독의 영상세계에 있어서 표출
방법을 고집하는 개성에 따라 감독과 콤비가 되어야 했습다. 그 예로 65편
의 작품을 남긴 신상옥의 경우 정윤주가 제일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다음
으로 황문평이 13편, 김성태가 2편, 그 이외의 2, 3명이 한 편씩 담당하였
습니다. 그리고 1965년 자유중국의 영화음악을 위하여 초빙되었던 황문평
은 자군별후(自君別后)·이창(离窓) 등 중국관현악단과 방송합창단을 동원,
대만과 홍콩에서 중국영화에 공헌하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젊은 연출가들의 영화감독 진출과 다양한 음악적
효과, 그리고 세계적인 전자음악의 유행에 따라 정민섭(鄭珉燮)· 김희갑
(金熙甲)·이철혁(李哲赫) 등 젊은 영화음악인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재즈음악을 전공하고 돌아온 정성조(鄭成朝)는 단
연 이색적입니다. 서울음대 교수 강석희(姜錫熙), 김정길(金正吉), 그리
고 국악을 전공하는 박범훈(朴範薰)·김영동(金永東) 등이 새로운 영화음
악을 창출해 내고 있었습니다.

역대 영화음악상 수상자로는,
1962년부터 시상한 문화공보부의 대종상(大鐘賞) 음악상에는
정윤주가 세 번, 한상기·황문평·최창권·정민섭이 각각 두 번, 김성태·
김대현· 김동진· 김희조· 김영동· 강석희 등이 한 번씩 수상하였습니다.
1958년부터 시상하였던 부일영화상(釜日映畫賞)의 음악상에는
정윤주·김동진·한상기·전정근·황문평·최창권·김성태 등이 수상하였습니다.
1963년부터 시상하였던 조선일보사 주최 청룡상에서는 김희조· 이봉조·
전정근·김동진·황문평·정윤주·최창권 등이 수상하였습니다.

외국영화제에서 국산영화의 수상한 기록을 보면
제 7회 아세아영화제서<흙>(장일호 감독)으로 김성태 처음으로 음악상 수상
제 9회 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감독)에서 정윤주가,
제13회 때 <귀로>(이만희 감독)에서 전정근이,
제24회 때 <관세음보살>(崔寅鎬 감독)에서 황문평이 각각 수상하였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30대의 젊은감독 기수들이 등장하면서 영화음악에도
젊은 작곡가들이 많이 참여하는 경향입니다. 이들의 작곡기법은 종래의 관현
악단을 동원하던 것과는 달리 주로 신서사이저(Synthesizer) 음악과 심지어
전자음악까지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보다 좋은 음향효과를 얻기 위
해 미국의 L.A, 러시아의 모스코바 그리고 호주의 시드니시에 까지 가서 음악
녹음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문체부가 1991년을 “연극·영화의 해”로 제정했습니다.
또 10월 27일은 “한국영화의 날”로 정해, 매해 행사를 치루어 오는 것이 통례
로 되어 있습니다. 1991년 10월 27일 장춘동에 있는 국립극장 무대에서
“우리 영화 큰 잔치”로 <영화음악제>의 막을 올렸습니다. 72년 동안
한국영화의 발달 역정을 파노라마적인 여러 영화의 주제가로 장식, 문예물
영상의 상징적 주제음악의 연주는 KBS TV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의 화려장엄
한 연주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로영화 음악가들의 공로패 증정식도 겯들여 졌었습니다.
“한국영화의 날” 기념식 때마다 영화의 각 분야별로 유공(有功)영화인을 선출
표창을 해 왔습니다.

근간의 영화음악 유공자들의 표창년대로는
71년도 황문평(黃文平), 72년도 전정근(田正根), 73년도 김희조(金熙祚),
74년도 한상기(韓相基), 75년도 정윤주(鄭潤柱), 76년도 김동진(金東振),
77년도 김대현(金大賢), 78년도 박시춘(朴是春), 79년도 이인권(李寅權),
80년도 최창권(崔彰權), 83년도 정민섭(鄭珉燮), 84년도 이철혁(李哲赫),
86년도 김희갑(金熙甲), 88년도 이상우(李尙雨), 90년도 김인배(金仁培),
92년도 신병하(申秉河), 96년도 이종식(李鍾植) 입니다.
영화음악을 전문적으로 작곡하는 회원수는 80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90년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가
종래의 각 전문분과가 8개 협회로 독립, 현재 연합회 형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영화음악 작곡가 협회”의 초대회장은 김성태(金聖泰),
2대 김대현(金大賢),  3대 황문평(黃文平),  4대 김희조(金熙祚),
5대 전정근(田正根),  6대 한상기(韓相基),  7대 정윤주(鄭潤柱),
8대 최창권(崔彰權),  9대 이철혁(李哲赫)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1 Comments
鄭宇東 2014.04.14 23:59  
1926년 춘사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통한을 겨레의 항일정신으로
집약해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영화가 도약하는 전환점을 마련한 흑백
무성영화입니다.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주제가 '신아리랑'도 대중적
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나운규의 이 <아리랑>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영상화하여 진정한 한국영화의 효시가 되었으며, 비로소
한국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작해서 신파물이나
모방적인 번안물을 만들어 내던 때에 나운규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기초
로 그 안에 당시 일제에 억눌리고 있었던 민족의 울분을 영화로 대신 승
화시킨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