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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웃자님 위에 놀자님

鄭宇東 0 1651
웃자님 위에 놀자님

우리 시정의 농담중에
학사 박사보다 높은 학위는 더러 인심 좋게 밥을 사는 사람 "밥사"이고
공자, 맹자, 순자를 웃도는 학문과 덕행의 스승은 늘상 "웃子"이고
웃자를 웃도는 인생살이의 영원한 진리는 "놀子" 라는 말이 있습니다.
Homo Ludens가 우리 인생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이란 뜻이겠습니다.
인정과 웃음과 놀이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인생 교훈처럼 들립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옛날부터 우리민족이 가무를 즐기고 놀이를 즐기는 민족이라 하였습니다.
과연 그래서 인지 그 증거라도 대듯이 우리의 고대 역사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웃음의 시원을 알려주는듯한 흥미있는 기예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사당의 기예나 서커스공연에서 보아왔던 장면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벽화의 기예 장면은 코미디와 무관하지 않고 장대타
기나 공굴리기 같은 묘기는 흔히 재인들의 웃기기와 같이 행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조에서는 가면탈춤인 산대마당 놀이가 크게 행해졌고 그때
마다 지금의 코미디의 성격을 짙게 내포한 재담같은 소학지희(笑謔之戱)
가 웃음으로 엮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재담의 가장 기본적인것으로 떠 올
릴 수 있는 것은 흉내내기입니다. 세조때의 대장장이 고룡과 귀뚜라미 소
리 흉내를 잘 냈던 송실솔과 조선조 말에는 박풍 등이 유명하다가 박춘재
에 이르러서 그 재능이 한껏 돋보였습니다.

이 외에도 굿판에서의 재담과 판소리에서의 재담은 중요한 재담의 무대
였습니다. 특히 배뱅이굿의 재담을 잘했던 박천복과
소리판은 숙종이후 허한담과 최선달이 시작하고 桐里 신재효가 12마당
판소리를 다섯마당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전하여 준 공로가 실로 막대합니
다. 이러한 조선조의 말기에 박춘재는 널리 알려진 경기 명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래의 재담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던 전무후무한 재담가였습니다.

1920년대 우리영화의 무성영화시대에는 변사가 인기 스타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변사는 김덕경이고 서상호가 가장 유명한 이름으로 남아있
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1935년대에 토키영화의 등장에 즈음하여 만
담가로 변신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영환이 특출하였습니다.
그는 본명이 김서정으로 진주에서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생의
슬픈 운명을 그린 영화낙화유수의 시나리오를 쓰고 동명의 영화 주제가
에 가사를 짓고 작곡하였습니다. 이 낙화유수는 우리나라 가요의 효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훌쭉이와 뚱뚱이는 양석천과 양훈이 만든 코미디 콤비팀입니다.
30년대 후반에 대화만담의 시조라 할수 있는 김원호와 손일평의 콤비가
있었는데 김씨는 체격이 홀쭉한 편인데 비해 손씨는 몸집이 비대한 편이
어서 미국의 무성영화 명콤비 로리와 하디와 비교 한국판 훌쭉이와 뚱뚱
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을 홀쭉이와 뚱뚱이의 제1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김씨가 타계하자 그의 대타로 등장했던 전방일 역시 후리 후리
한 키에 깡마른 몸집이라서 홀쭉이 역할에 적격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손씨는 라미라가극단 출신의 지일련과 콤비를 이루면서
우리나라 만담계의 남녀대화만담의 시조격입니다. 신불출이 독보적인
존재로 만담시대를 개막한 이래 제자 박천복 이은관과 여제자 김윤심과
공연하였고 신불출이 성광현, 김진문 등과 동성콤비를 이루었듯이 동성
콤비가 주였는데, 손씨는 나중에 지일련과 결혼하여 우리나라 만담계의
한 부부콤비의 모델이 되어 이후로 왕평-나품심, 이종철-박옥초, 전옥-
강홍식, 신은봉-이경환 등의 부부콤비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치하에서 일본 문물의 수입은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그래서 일
본의 만자이(漫才)가 들어와서는 신불출 등의 아이디어로 만담으로
재창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불출이 활동할 당시 함경도 출산의 황재경
목사가 특이한 신분으로 만담에 참여하였고 훗날 곽규석이 연예계에
종사하다가 목사가 되어 목회하였습니다. 서구에서 연극이 들어온지 20
여년만에 웃기는 연극을 시작한 희극배우 전경희와 석와불의 이름은 듣
기만하여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독보적인 만담가였습니다.

우리나라 원맨쇼의 시조는 이난영의 남편으로 월북한 김해송으로 알려
져 있습니다. <선창. 다방의 푸른꿈. 연락선은 떠난다> 등의 가요가 있
는데 월북자로 금지곡이 되어 처남 이복룡을 작곡자로 적고 있습니다.
본명이 김송규이고 숭실학교 출신인 그는 연예기획에 남다른 재능을 보
였습니다. 전방일은 복화술의 원맨쇼 무대를 가져서 그 방면의  제1세대
가 되었고, 뒤 이은 부길부길쇼의 윤부길이 제2세대, 훌라이보이 곽규석
이 연예 그 제3세대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장소팔-고춘자 콤비의 명성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원맨쇼의 이복분은 이국인의 풍모에 프랑스의 샹송가수 모리스 슈발리
에의 샹송 모창을 잘했고, 싱가폴의 영국사령관 파시벌장군의 비굴한
일본항복장면에서 "하일! 히틀러"로 벼락같이 변신하는 모습이 일품이
었고, 이원철이 찰리 채플린을 흉내내는 것 또한 박진감이 넘쳤습니다.
이원철은 나중에 여배우 도금봉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양석천과 양훈은 한국판 홀쭉이와 뚱뚱이의 제2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영춘과 배삼룡(本 배창순)에 이르면 그 제3세대라 할 수 있는
데 이와같이 우리나라 만담계에는 이러한 홀쭉이와 뚱뚱이의 전통이 길
게 이어지는 기현상이 전개됩니다. 이 밖에도 희극영화에서 김희갑(합
죽이)과 구봉서(막둥이)가 단짝이고, 또 가요계에서는 서수남과 하청일
이 명콤비였습니다.

서영춘은 극장의 간판을 그리다가 작곡가인 그의 형 서영은이 구봉서에게
소개하여 극단에 들어가 구봉서의 덕택으로 코미디에 입문, 크게 성공하
였습니다. 소재를 가장 많이 가진 구봉서는 서영춘을 평하여 그는 만연필
로 썼다가도 이쑤시게로도 쓸 수 있을 만큼 여러가지 역할을 잘 소화해냈
다고 평하였습니다. 서영춘은 그의 성품의 일단으로 전세 비행기를 타고
가서라도 녹화 시간을 꼭 맞추었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배삼룡의 덜떨어진 듯한 언행 뒤에는 얼음같은 이성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회고록에서 그는 " 나는 미진아다. 어느 것에도 날렵하게 적응 할 줄 
모른다. 매일 얻어 맞고, 눈물 흘리고, 구박받고, 천대받는 광대이다. 나는
도시화되어 가는 한국의 촌뜨기요, 공업화되어 가는 세상의 농삿꾼이며
서구화되어 가는 서울의 바지저고리이다. 나는 고속도로에 진입한 전라도
마부요, 종로 네거리의 요란한 자동차 경적 소리에 당황하고 있는 리어카
꾼이며, 명동의 부츠 신은 아가씨들 틈에 낀 짚신 신은 지게꾼이다"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신랄한 자기 성찰입니까?

단순한 소리나 몸짓의 흉내내기에도 웃음은 존재하고
위와 같은 배삼룡의 철학에 맞닿는 단막 코미디에도 웃음은 있습니다.
나아가 웃다가, 해야만 하는 노르마로서의 일이 끝날 즈음이면 
잘 노는 법을 알아내어 웃음에 이어 놀이에 온 힘을 쏟아부을 것입니다.
아무튼 많이 웃어서 삶의 활력소를 많이 얻어 삶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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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웃 음 사 // 반재식 著 / 백중당 / 서울, 2004년
재담 만담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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