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신요칼럼
신요칼럼
 

선악에 관한 일소고

鄭宇東 0 1595
善惡에 관한 一小考
조로아스터(Zoroasta)敎는
고대 이란의 신앙 마즈다敎를 B.C. 7~B.C. 6세기경 조로아스터가
개혁한 종교로 善(아후라 마즈다)과 惡(아후리만)의 두 원리의 상극이
세계의 본질이라 규정하고, 궁극적으로는 선의 승리로 끝난다고 설교하
고 있습니다.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에 마즈다교라
고도 하고, 또 배화(拜火)의례가 있기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합니다.
선의 대표적 요소인 빛, 불, 물, 흙 등을 신성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화장,
수장, 토장을 배제하고 조장(鳥葬)의 습관이 행해졌던 것입니다.

도대체 善이란 무엇이고 또 惡이란 무엇인가? 
고 물으면서 선악 자체의 의미를 먼저 살펴 보기로 합니다.
우리는 보통 선이란 말에서 착함과 좋음을 떠올립니다. 선(善)이라는 한자
어가 온순한 양(羊)을 표상하여 만들어졌듯이, 착함으로서의 선은 어질고
고운 마음씨를 뜻합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性善)’고 할 때,
그가 말하는 본성의 선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뜻하는 것인데, 이렇게 어진 마음이 곧 착함으로서의 선입니다.

이에 비해 좋음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싫다’의 반대로서 ‘좋다(好)’는 주관적인 감정 표현인데 반해서, ‘나쁘다’
의 반대어로서의 ‘좋다(善)’는 객관적인 가치 평가입니다. 예를 들어
“그 의사가 좋다”고 할 때, 전자의 의미로는 “나는 그 의사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지만, 후자의 의미로는 “그 의사는 훌륭하고 유능하다”
다시 말해 “그 의사는 환자의 건강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만한 능력
이 있어서 진단이나 투약을 잘하는 자이다”라는 뜻입니다.

서양의 윤리학에서 논하는 선은 착한 심성이나 개인적인 호감이라기보다
는, 이렇게 ‘훌륭하다’ ‘유능하다’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좋음입니
다. 이런 식의 좋음을 뜻하는 선을 영어로는 good, 라틴어로는 bonus, 그
리스어로는 agathos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 가지 단어는 단순히 문자적인
번역을 넘어서, 각 시대의 세계관까지도 반영한 말들입니다.

먼저 그리스어 agathos는 주로 훌륭함으로서의 선을 의미합니다.
좀더 나은 상태를 뜻하는 aga와 연관된 말인 agathos는 보다 훌륭하고 좋
고 바람직한 것으로서의 어떤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이럴 경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하여 그런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좋은 것, 즉
선입니다. 이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물의 고유한 본성을 완전히 발휘하
여 자기의 존재의미를 충족시키는 것을 선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라틴어 bonus는
주로 즐거움이나 행복으로서의 선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시대인 중세에
서 선은 자연적 본성의 발휘라기보다는 전능한 신의 의지의 발현입니다.
이제 완전한 존재인 신은 선 그 자체이고, 행복은 그런 신을 신앙함으로써
채워지는 충만한 기쁨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식의 행복과 기쁨을 뜻하는
beo와 그런 것을 가져다 줌을 뜻하는 dou에서 유래한 말이 바로 bonus입
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 수당쯤으로 알고 있는 보너스는 원래 신을 묵
상하거나 신앙하는 것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일종의 배당금처럼 할당된
행복이나 기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근대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
행하였는데,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말이 영어 good입니다. 이때 good
은 주로 유능함 또는 유용성으로서의 선을 의미합니다. 결합과 일치라는
뜻의 ghedh와 관련된 중세 영어 god에서 유래한 good은 원래 ‘∼에 적합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에 적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는데
적당하고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good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데 능
력이나 쓸모가 있다는 유용성의 측면이 강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근대에는,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영미 계통에서는, 인간이 바라는
목적이나 욕구가 충족되어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곧 선이고 바람직
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됩니다. 산업주의와 자본주의가 세계화의 이념
으로 작용하고 있는 오늘날, 선의 표준적인 모델은 이런 식의 유용성입니다.
이런 입장을 좀더 극단화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가 있는 유용한
사람, 그런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이고, 그
렇게 되는 것이 곧 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서양에서 선은 훌륭함이나 완전함, 즐거움이나 행복 또
는 충만, 유능함이나 유용성 등을 의미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의 반대로서의 악은 불완전함과 무능함과 결핍을 그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인간의 이성적 본질과 사회의 합리적
규범과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와 신의 엄격한 명령 등을 위반함으로써 야
기되는 모든 불행과 고통과 죄가 바로 악입니다. 더욱이 선악과를 처음
따먹은 것이 여자였다는 신화 이래로, 여성은 육체나 물질이나 감각의
화신으로서, 정신과 이성의 소유자인 남성을 악으로 유혹하는 존재로 간
주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위반으로 인한 고통이 곧 악이라는 점은 악의 영어형인 evil과 bad
를 분석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evil은 ‘초과’라는 뜻의 upel과 관련된 중세 영어 ivel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
래 ‘적당한 한계를 넘어선’이라는 뜻이고, bad는 ‘강요’라는 뜻의 bheidh와
관련된 중세 영어 badde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괴롭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이 정신적인 이성인
이상, 육체나 물질이나 감각은 선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쓸모 없는 것이라
는 점에서 악과 관련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까지 말한 선(good)과 악(bad)이 우리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면, 옳음
과 그름에 해당하는 것은 정(正, right)과 사(邪, wrong)입니다. 우리말
‘옳다’는 ‘바르다’와 관련된 말입니다. 이 점은 ‘옳다’에서 유래한 ‘오른’쪽과
‘바르다’에서 유래한 ‘바른’쪽이 모두 같은 방향[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
실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런데 ‘바르다’는 직선처럼 올곧은 어떤 원칙에 잘
‘맞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름이나 맞음이라는 뜻의 옳음은 주어진 평가
의 기준이나 원칙에 잘 부합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옳다는 뜻의 영어 right의 고어형 riht는 원래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똑바르고 올바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right에는 옳음과 오른쪽이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직선을 곧
바로 따라가기에 올바른 것이라는 뜻도 함축돼 있습니다. 결국 우리말
‘옳음’과 영어 right는 상당히 유사한 발상법 하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양자는 직선처럼 곧은 것을 진리나 원칙으로 상정
하고 이것에 따르는 것을 옳음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이처럼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원칙을 일종의 직선적 이미지로 표상하는
것은 한자어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르다거나 옳다는 뜻의 정(正)은 사람
이 땅(一)에 발(止)을 딛고 똑바로 서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이처럼 사리나 규범에 똑바로 들어 맞음이 옳음이라면, 옳지 않음
이란 그런 것에 잘 맞지 않아 뒤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옳지 않은 것은 그른 것이고, 그른 것은 어긋나거나 틀어진
것이며, 틀어진 것은 곧 틀린 것입니다. 또한 그름을 뜻하는 영어 wrong
의 어원 wring은 본래 ‘뒤틀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양
자 사이의 비슷한 발상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좋음과 나쁨 혹은 옳음과 그름에 관해 설명한 것은 단순히 어원
학적 분석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들에 관한 철학적인 용법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즉 윤리학에서 ‘좋음’은 주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
는 데 유용한 것’인데 비해서, ‘옳음’은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에 순수하게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좋음과 옳음의 이런 의미는 다음에서 도덕 판단의
기준을 논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좋든 싫든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관한 기술이며, 그냥 그렇게 있
는 것인 存在(Sein)에 관한 판단입니다. 이에 비해 “그 의사가 좋다”는 것
은 그가 훌륭하고 유능하다는 말이며, “그 의사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그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잘 수행했다는 말입니다. 즉 그것들은
있으면 좋을 어떤 가치에 관한 평가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인 當爲
(Ought ; Sollen)에 관한 판단입니다.

윤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 도덕판단은 전자와 같은 사실판단이나 존
재판단이 아니라, 후자와 같은 가치판단 혹은 당위판단입니다. 다시 말
해 도덕판단이란 당위와 가치에 관한 평가 진술로서, “어떤 것이 좋다 /
나쁘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것이 개인이나 개인의 행위 혹은 개인의 양심 등일
때 그것은 개인윤리적 도덕판단이며, 그 어떤 것에 해당하는 것이 사회
의 구조나 제도 또는 정책 등일 때 그것은 사회윤리적 도덕판단입니다.

종래의 윤리학에서는 개인윤리가 중심이었습니다.
개인의 행복이나 쾌락, 우정, 용기 등이 주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란 단순한 개인의 총합 이상의 것이며, 사회의 기본구조는 개인의 성격과
희망, 나아가 개인의 지능과 능력까지도 결정하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것이 밝혀져 감에 따라 사회윤리가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서양에서
공리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은 이러한 일종의 사회윤리적 배경속에
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책임을 사회라는 맥락에서 재규정하는 사회윤리에서는,
개인을 지배하는 논리와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다를 뿐만 아니라, 오
히려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가 우선적으로 작용하여 개인을 지배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지주가 농노를 착취하는 봉건체제 하에서 지주의
자선 행위는 개인윤리적으로는 선일 수 있지만, 사회윤리적으로는 악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상실을 막기 위해 지주가 춘궁기의 농노에게 식량을
원조해 주는 것은 도리어 농노의 저항 의식을 마비시켜, 부당한 체제를
영속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윤리
를 무시한 채 체제 자체의 정당성을 미리 가정해 놓고, 개인 윤리만 문제
시하여, 그 체제 내의 모든 개인들이 선해지면 사회도 선해지리라 기대하
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이러한 발상법은 당연히 져야 할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사회에 전
가하는 무책임을 양산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파렴치한 범죄자에게 그의 개인적인 책임을 먼저 묻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런 범죄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그러한 일이 발생
할 만한 사회의 배경을 미리 정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개인윤리적으로 보느냐 사회윤리적으로 보느냐에 따
라 도덕판단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인윤리든
사회윤리든 양자가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공통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
은 해야 할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지시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
고, 이런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윤리학의 임무라고 보는 생각입니다.
행위의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윤리학을 규범윤리학이
라 부르며, 이것이 윤리학의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 가치를 평가하는 규범윤리학에서는 도덕판단의 기
준을 정하는 것이 사실판단에서처럼 그렇게 일의적이지 않습니다.
가치판단과 당위판단은 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인데, 행위의 평가
는 그 행위의 원인인 동기와 그 행위의 결과라는 최소한 두 가지의 관점
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행위의 동기나 그 동기가
의무로서 고수하고자 하는 원칙, 행위의 결과나 그 결과를 통해 실현되
는 목적이라는 두 가지의 진영 중 어느 쪽에 기준점을 두느냐에 따라 선
과 악, 정과 사의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Honor Among Thieves 라는 말을 맨 처음 쓴 사람은
로마시대 정치인 Marcus Cicero(106~43 B.C.)였다고 합니다. 그는
'도둑도 규칙과 의무가 있는 법'(Thieves even have a code of laws to
observe and obey.)이라고 했고, 셰익스피어는 '도둑끼리도 약속을
어기면 천벌을 받는 법'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
쯤에 이 말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Edgar Wallace 같은 작가는
“도둑사이에 의리는 없고 좋은 도둑 사이에만 의리가 있다"고 말했습
니다. 이후 "도둑 사이에는 의리는 없다" 같은 변형이 더 많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리하여 적어도 서양 문화에서 깡패 문화나 조폭, 조
직 범죄를 미화하는 사람은 없어진 셈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촛불을 훔쳐서 거룩한 성경을 읽으면 可賞한가 ?
도둑이 절도질하여 그 재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可容한가 ?
비방과 저주로 상대방이 도리혀 분발하여 더 잘 되면 可納한가 ?
이와 같은 일들은 애시 당초부터 반윤리적이며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꼭 필연적인 관계라 할 수 없으므로 전자의 행위자는 징벌을 받아야
하며 다만 그 정황으로 보아 정상을 참작하여 형량의 감형사유가 될수
있을뿐입니다. 현행의 법률체계에 있어서는 어떠한 범법행위도 위법
성을 저각하지 않음을 기억하고 뜻뜻하게 즐겁고 유용한 행동만을 할
것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