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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미술의 고향

鄭宇東 0 1885
미술의 고향

 
* 미술의 전설상의 태초의 고향은 
양치기 목동과 산과 들의 목장입니다. 탈란트가 많은 목동들은 막대기로 땅위에
동물들의 그림자를 따라 그렸고, 연인들은 헤어지는 마당에 밤늦도록 이별을
서러워 하다가 서로의 그림자를 그려서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것이 프로필이고
초상화의 시초입니다. 태고대의 암벽화에서 보는 다산을 바라는 주술이, 풍년에
의 기도가, 하늘에의 제례가, 노동현장의 묘사가 다 애시당초의 그림입니다.

* 동양화에서의 여백과 담채수묵의 미는
서양화의 원색의 채색화와 구도의 충만성과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이슬람권의 기하학적 문양과 불교권의 만타라문양도 지역성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토속문양은 그들 나름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원초감정의 유사성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미술재료의 지역성은 조각의 양식과 규모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 고갱과 타히티섬
폴 고갱(Eug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은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입니다.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는 주중에는 증권회사의 사원으로 일하면서 주말에 쉬면서 일요화가로서 그림
을 그렸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여러번  파리와 프랑스를 떠났지만 정작 어려우면
조국과 파리에 돌아오기를 그듭하다가 타히티 파페에떼에 돌아온 고갱은 병마에
시달렸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 겪었던 처절한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그림이 유명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
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건강이 나빠져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그림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
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서머셋 모음의  대표작 < 달과 6펜스>의 모델이 된것으로도 유명
합니다. 주요작품에는 <황색의 그리스도><타히티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 로트렉의 놀이마당 물랭루쥬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 1901)은
프랑스의 화가로 남부 프랑스 알비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본래 허약한데
다가 소년 시절에 다리를 다쳐서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
심하고 그림에 몰두하였으며, 파리로 나가 미술 학교에 다나며 드가, 고흐와
친분을 맺어 그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한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 등을 미워하였습니다. 

현대 미술사에서 그에 필적 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묘에 뛰어났던
그는 몽마르트에서 유명해 지자 주로 캬바레 물랭루쥬에서 서커스 · 놀이터 ·
운동경기 · 무용장 · 초상화와 거리의 여인등을 즐겨 그렸으며 포스터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거리의 여인 로자 라 루쥬는 문벌 높은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서러운 그에게 위안을 주는 고향같고 어머니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화풍은 인상파에 속하고 색채 취급, 성격 묘사에도 뛰어 났습니다.
유화외에 파스텔, 수채화, 석판에도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 작품으로는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등이 있습니다.

*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불안과 초조를 참다 못해 절규하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려준
놀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일기에서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녂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 때 자연을 관통하는(가로지르며 울리는) 비명소리를 들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태어난 북구의 변덕스런 기후와 칼로 후벼 파놓은
듯한 날카로운 피요르드의 지형지리적 영향과 어린시절 가족의 죽음에서 온
공포와 불우한 환경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물로 이해됩니다.

* 귀 짜른 고흐와 눈 찌른 崔北
예술-미술가들의 자극에 대한 반응은 단호하고 처절한 경우가 많습니다.
서양의 고흐는 주변의 입방아가 듣기 싫다고 자기의 귀를 잘라 버렸고
우리나라의 최북은 세도가들이 거드름 피우는 것이 보기 싫어서 자기의 눈을 찔
러 멀게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고향이야 어디든 간에 싫은 것에 대한 예술
가들의 반응은 이렇게 처연하고 또 서로간에 많이 닮아 있습니다.

술마시고 파리의 대로에 누워서 자유일탈하는 현대의 영웅 우리 모딜리아니와
꿈과 환상으로 하늘에 부상부유하는 인간과 동물의 정화된 모습을 그린 샤갈과
목욕하는 여인의 뒷모습으로 앞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겨 준 앵그르와
<야드비가의 꿈>처럼 푸른 낙원을 열어 준 소박파화가 앙리 루소와
같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지?
그들이 나고 성장하고 교유하고 횔동하다 죽은 곳의 정보도 앞으로 갖고 싶습니다.


==> INFORMATION GRACE
        인터넷 두산백과사전(Doopedia)을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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