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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祭亡妹歌 부용산

鄭宇東 0 1948
祭亡妹歌 부용산
 
벌교지방의 대표적인 노래의 하나는
박기동 시인과 안성현 작곡가의 합작품인 가곡 부용산입니다.
당시의 두 사람은 목포 항도중학교에 근무하는 동료 교사였습니다.
국어교사 박선생이 그를 따르던 문학소녀 김정희의 죽음을 당하여 꽃같은
누이를 묻은 후 지은 시에 음악교사 안성현이 누이를 잃은 슬픔에 빠졌다
가 이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듸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시대의 비극으로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애창하여
일명 빨치산의 노래로 불려졌기 때문에 작곡가의 월북사실과 맞물려
가창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작시자 박기동도 연좌제에 걸려
음양으로 과해오는 압박에 못이겨 오스트랄리아로 이민가 있다가 연극인
김성옥의 노력으로 52여년만에 다행히도 원작자에 의하여 그 2절을 작사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芙蓉山)이란 본래 불교적으로 지어진 이름입니다. 
芙蓉은 한자로 연화(蓮花)라고 하는 연꽃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꽃은 그 색이 아름다우며 진흙에 살면서도 그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꽃
을 피우기에 예로부터 인도에서는 보배로운 꽃으로 여겨왔고, 
불교에서도 불타(Buddha)나 보살의 좌대를 연꽃 받침으로 장식하는 것이
그런 연유입니다.

보성군 벌교읍에는 부용산 외에도 불교적인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입니다. 
소화다리의 본래 이름인 부용교를 비롯해 이곳 사람들이 진트재라고 부르
는 진토재, 제석산, 존제산, 연산리 등입니다. 이는 오래되고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수많은 불전을 간행했던 징광사가 있었던 까닭에 옛날에는 벌교
읍 전체를 불교성지로 여겨왔던 때문일 것입니다.

애가 끊이도록 애절하고 구슬픈 노래 부용산은 무슨 기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기에 그 오랜 세월동안에도 잊혀지지 않고 남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알고 나이 지긋한 사람이면 지금도 한 소절씩 불
러제낄 만큼 마성적인 전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내력에 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터놓고 계속 불려지지 못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런 단절상은 우리의 역사가 그러하듯 국토분단과 한국전쟁이 큰 원인이
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용산의 곡을 지은 안성현선생은 우리가 잘 아는
동요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작시)를 작곡하신 분입니다. 
슬프고 아름다운 부용산이라는 노래는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었다는 이유
때문에 반공 제일주의 시절에 빨치산 노래로 오해되어 마음 놓고 부르지
했다고도 하고, 멜로디를 붙였던 안성현 선생이 고모였던 무용가 최승희
선생을 따라 월북을 했기에 금지곡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만 간간이 전해져 온 가곡 부용산의 창작에 얽
힌 사연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노랫말을 쓴 박기동선생의 유난히 예쁘던 누이가 나이 열 아홉에 여수에
서 벌교읍으로 시집을 왔고, 스물 다섯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까
닭에 어려운 시집살이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누이는 폐병(결핵)을 앓았었고, 가족들의 보살핌
도 보람이 없이 결국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기동선생이 그토
록 예쁘고 아꼈던 누이의 주검을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슬픔을 이기
지 못하고 쓴 것이 부용산이라는 시였었다고 합니다.

1948년 무렵 당시 목포의 항도여중에서 음악과 국어를 가르쳤던
안성현선생과 박기동선생이 문학소녀 애 제자 김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의기투합하였습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박기동선생이 써 두었었던
시 부용산에 안성현선생이 곡을 붙여 제망매가(祭亡妹歌) 같은 노래가
만들어졌으니 그게 바로 부용산이라는 가곡입니다. 그 때문에 한때 목포
의 노래다 벌교의 노래다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2000년 초여름 어느 날,
뜻 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호주에 사시다가 며칠 귀국 했었던 박기동선
생이 증언을 함으로써 지역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보성군 벌교읍에서 쓴 시에 목포시에서 곡이 만들어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음악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하나는
월북 가야금 산조의 안기옥 명인이 작곡가 안성현의 부친이었습니다.
그는 1946년에 월북하여 평양음악무용대학 민족음악학부 강좌장으로
김일성주석과도 음악적 논쟁을 벌일만큼 큰 이론가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안작곡가가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과 친척관계라는 설을 부인하는
이설이 있습니다. 안막은 죽산 안씨이고 안성현은 순흥 안씨라는 것입
니다. 예술가로서의 동지감에서 볼때, 나는, 그 어떠러한 혈연친척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안작곡가를 최승희의 조카-고모사
이로 소개한 것은 부친 안기옥이 한때 최승희무용단의 단장을 지낼때의
친분과 정의를 고려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續) 문학속의 제망매가
 
우리나라 문학중에는 누이를 제사지낸다는 장르의 글이 많습니다.
우리들의 누이는 옛날부터 살림밑천으로 물건처럼 장만되었고
가난한 살림에 머구리는 오빠 차지, 누이는 배고프고 병약하였고
깊은 물에 던저져 洑堤의 튼튼한 기초가 되어 가족과 마을을 구하였고
누이는 겁쟁이 오빠들을 대신하여 용감히 괴물의 제물로 희생되고
오빠의 입문출세를 위하여 화류계까지도 감연히 투신하는 누이들입니다.
그러니 누이에 대한 애뜻한 연민은 문학속에 자주 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문학에서의 제망매가의 원조는
신라의 향가에 실린 月明師의 祭亡妹歌입니다.

生死路隱(생사로온)
생사로(生死路)는
삶과 죽음의 길은

此矣 有阿米次肹伊遣(차의유아미차힐이견)
예 이샤매 저히고
여기(이승)에 있음에 두려워서
(살아있어도 언제 죽을지 모름에 두려워서)

吾隱去內如辭叱都 (오은거내여사질도)
나는 가나다 말ㅅ도
"나(망매)는 간다"라는 말도

毛如云遣去內尼叱古(모여운견거내니질고)
몯다 닏고 가나닛고
못다 말하고 죽는것인가
(유언 한마디 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 누이에 대한 슬픔)

於內秋察早隱風未 (어내추찰조은풍미)
어느 가살 이른 바라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누이의 요절을 나타냄)에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이의피의부량낙시엽여)
이에 저에 떠러딜 닙다이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잎(누이의 죽음)처럼

一等隱枝良出古 (일등은지량출고)
하단 가재 나고
하나의 가지(같은 부모)에서 오누이로 태어나고서

去如隱處毛冬乎丁(거노은처모동호정)
가논 곧 모다온뎌
가는 곳(죽음의 세계, 죽음의 시기 및 순서)을 모르겠구나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아야미타찰량봉호오)
아으 미타찰(彌陀刹)애 맛보올 내
아아, 미타찰(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에서 만날 나(월명사)는

道修良待是古如(도수량대시고여)
도(道) 닷가 기드리고다
불도(극락왕생의도)를 닦으면서 기다리겠노라 
 

일제식민치하의 질곡속에서
"홍도야 우지마라, 굳세어라 금순아" 등의 속죄하는 가요가 유행하였고
해방과 분단정국의 소용돌이를 거쳐
부용산, 엄마야 누나야, 접동새, 국화 옆에서 등의 가곡이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나라밖에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봄의 생명력을 깨우기 위하여
정결하고 아름다운 누이를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래들이야 말로
심청이가 부친을 위해 인당수의 제물이 된 효심이요
마을의 안녕을 위한 용감한 누이에 대한 기림이요
가정의 기둥이 된 아름다운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요
비겁한 오빠들의 예뻣던 누이에 대한 연민의 정이요
연약한 누이 뒤에 숨어버린 남정네들의 고해성사이며
또 누이로 나타낸 영원한 모성상에 대한 그리움과 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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