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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붓을 놓으며

鄭宇東 0 1356
붓을 놓으며

붓이 가는대로 편하게 쓰는 글을 수필(隨筆)이라 합니다.
어떤 주제도 정하지 않고 편안히 쓰는 내 안팎의 글은 또 제목도 없습니다.
마치 성경 기록들이 기록자 개인의 말이 아니고 신의 뜻을 대필하는 도구
로서의 자동기록장치에 불과하듯 말입니다. 여기에서 내 마음속의 의식의
흐름에 맡겨 붓이 가는대로 수사나 가감없이 진솔하게 나를 말하려 합니다.

素月의 시 "사노라면 사람은 죽는 것을" 을 외우노라면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물의 始終 양단간의 분별일 뿐입니다.
마치 우리 인생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기 위하여 아둥 바둥 애쓰면서
힘겹게 살아가며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개똥밭에 딩굴어
도 이승이 좋다"는데 우리 인생 한번 태어나 영원히 살 수는 없을까요

우리 평범한 인생은, 심오한 철학적 사고나 현학적 이론을 제쳐놓으면,
단순용이 간단명료하게 말하여 피고구락(避苦求樂)의 삶을 추구합니다.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여 또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하는 괴로움
반갑게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즐겁게 담소할 수 있는 정도의 유복함
노래를 부르면 화음으로 화답하고 高山流水를 평하는 知音知己하며
글을 쓰면 안광이 지배를 철하여 촌철살인의 평을 아끼지 않는 문우며
음악회나 영화관에서 약속없이도 만나지는 약간명의 동호인 동지들과
갈라테이아와 陳芸이와 루 살로메와 아그네스가 내 작은 가슴에 구원
의 여인상으로 살아 있어서, 불행중 그래도 인생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세상만사 만물은 질량불변의 원칙에 따르기때문에, 증감의 변화에는
일방에 이익을 주면 타방에 손실이 오는 제로섬으로 균형을 취합니다.
물질에서의 증감은 동일물은 아니지만 가까이에서가 아니면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서 감증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WIN - WIN 전략은 희귀한 사례일 뿐입니다.
 
밤의 영롱한 별빛은 밝은 낮 태양에 나오면 더 밝아지지 않고 사라집니다.
아버지나 형의 명성에 가리워서 아들이나 동생의 명성이 제 값을 발휘하
지 못하고 희석되기도 합니다. 또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
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한 자식을 낳거나 두 물질이 화합하
여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 지는 것을 세간에서는 "1+1= 1" 의 수식으로 표
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加減乘除의 연산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별 세계인가 봅니다.

금주나 금연 캠페인에는 절주나 절연도 아니고 술이나 담배가 바닥나 없어
지기까지 난폭하게 음주 흡연하자는 농담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나의 소견
으로는 원천적으로 술이나 담배를 만들지 않으면 만사휴의 아닐까요
그러면 이념이나 종교가 달라 다투고 있는 투쟁세상에서 평온한 평화세계
를 이루기 위하여 원수를 박살내듯이 상대방을 무찔러야만 평화가 올까요

신의 유무에 대한 존재론적 가설들은 증명이 불가능한 사안이고
신의 역할에 대한 가치론적 탐색들은 인간가치의 실현에 있어서 필수적
사안입니다. 현대의 과학지식은 전지 전능 진선 진미한 신이 인간과 만유
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결점이 많은 인간이 완전무결한 신
을 열렬히 희구하면서 만들었다는 심증이 더 굳어집니다.

행악을 참지 못하고 진노하는 신, 관대하지 못하고 몇배로 벌하는 신,
축복보다 저주를 더 많이 퍼붓는 신, 특별한 한 지역과 인종에 집착하는
신은 우주적이지도 보편타당하지도 않은 편협한 신일뿐입니다.
허고많은 신의 이름에서 어느 신이 참신인지를 알지 못하게 방치하는 것
은 순전히 신의 잘못입니다. 러셀같은 수많은 불가지론 교도가 있습니다.
파스칼의 도박확률론과 칸트의 요청적 유신론이 인간의 선행을 보장하는
길이라니 인간 지성사의 온축이 너무 미미함을 봅니다.

이제 내 신변잡사 쓰기를 마감하려고 하니, 좀 염려스러워 집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글을 허락없이 인용하였다고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고
어떤 백과사전 발행자는 저작권을 침범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해
온 것이 한 두어 건 있어서 이 글들을 쓰는동안  내내 개운치 않았습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톡 까놓고 말하여 글이나 책의 내용이 자기
만이 창작한 자기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일찌기 성경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글 쓰는 사람들은 (이사야 28장 13절의 원뜻과 반대로 쓰지만)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 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여기서도 조금 저기
서도 조금 따와서 완성시킨 글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의 새로운 아이디
어나 신발명 발견은 선인들의 지식과 지혜를 빌려서 그들의 어깨위에 올
라서서 시작하는 혜택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리를 깨닫고 있
었기에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기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다"
고 겸허히 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제 나의 글감 리스트도, 아이디어도 고갈되었습니다.
이제는 글을 쓸라치면 이전에 한번 썼던 글들을 다시 쓰게 됩니다.
글쓰는 사람들이 절필을 하고 재충전을 위하여 공부하러 산중으로 은거
하는 이유를 알듯도 합니다. 나의 경우는 산중이 아니라 집 근처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좀 더 공부하였으면 좋겠는데 그리만 할려도 이제는 솔
직히 좀 나의 형편이나 힘에 부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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