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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배우자는 이쯤 돼야

鄭宇東 0 1653
현명한 배우자는 이쯤 돼야 

영국의 재상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40~1881)의 부인 메리 앤은
참 현명한 부인었나 봅니다. 그녀는 12살 연상의 돈 많은 과부로서 결혼하여
디즈레일리의 재정적 위기를 구하여 주었고 그녀의 현명한 내조가 그의 성공과
출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디즈레일리가 의회에 연설하기 위하여 마차를 타고 가는데 마차의 문에
손을 다치는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남편의 심기를 어지럽혀 연설하는데 지장
을 주 지 않도록 참고 있다가 마차를 남편이 내린 후에는 그만 까무리치고 말았
다 합니다. 또 이 부인은 남편이 출타하여 귀가하기 전에는 밤이 아무리 늦어도
등불을 끄지 않았다 합니다. 집이야 말로 배타적 치외법권적 안식처이고 최종의
귀착지인데 불빛 없는 등대가 쓸모없듯 사랑의 정으로 밝혀주는 등불이 없는 가
정은 흡인력이 없어서 안된다는 신조 때문이었나 봅니다.

보기만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파커부인이 자기집 현관에 들어서는 것을 본 목사
는 얼른 일어서서 2층으로 올라가며 접대를 부인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한 반 시간쯤 지나, 아래층이 조용해 지자, 이제는 아마 그 파커부인이 돌아갔나
보다싶어, 목사가 아래층에다 대고 "그 수다쟁이 할멈은 돌아갔소?" 하고 물으니
아래층에서 부인의 대답이 이렇게 들려 왔습니다.
"그럼요, 그 할머니는 벌써 가셨지요. 지금은 파커부인께서 와 계시는 걸요"
순진한 바보였더라면 당황하여 들통이 나거나 거짓말로 새로운 죄악을 저지를
텐데도 슬기로운 부인의 대답이 적절하여 목사의 체면을 구하여 줍니다.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는 악처의 전형으로 악평이 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늘그막에 크산티페를 처로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내로서 남편의 언동(言動)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항상 상스러운 말로 욕하는
등 남편을 경멸하며, 바가지를 지나치게 긁어서 악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크산티페는 석수장이(소크라테스는 원래 돌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일을
게을리하고 맨날 철학 담론을 주고 받은 소크라테스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상당
히 못 마땅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생활인으로서의 무능한 소크라테스에게 화가
치밀어 어느 날 그녀가 소크라테스에게 호통치며 물벼락을 안기자, 소크라테스
는 "저것 봐, 천둥 뒤에는 항상 소나기가 쏟아지는 법이야" 하면서 시치미를 떼
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악처 노릇에 대해서는 후세 사람들의 과장이 심
하여 확실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BC 399년 독이 든 당근즙을 먹고 이 세상을 뜰려고
할 때 크산티페는 어린 두 아들(소프로니스코스와 메네크세노스)를 붙들고 엉
엉 울었다고 합니다. 이에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운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비록 생활인으로서의 소크
라테스에 대해서는 '바가지'로 일관하였던 크산티페이지만, 소크라테스의 임
종을 앞두고 보여 주었던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적인 면이 강했던 사람이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기사 우리 동양에서도 성인군자인 공자의 부인도 크산티페에 못지 않은 악명
을 누리고 있습니다. 공자는 명성에 비하여 성벽은 매우 까다로웠다고 합니다.
밥상에 고기가 오르면 네모가 나도록 자르고, 잠옷의 기장은 발을 덮도록 길며,
왼소매는 손을 감추도록 길며 오른쪽 소매는 손이 나와서 하시라도 일할 수 있
어야 하는 등의 까탈통에 못이겨 집을 나갔다 하니 동정이 가고도 남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악처들은 다 남편들이 만들었고, 그들은 또 남편들을 철학자 -
도학자로 만드는 전통이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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