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秺侯 金日磾에 대한 小考

鄭宇東 0 1686
투후 김일제에 대한 小考
얼마전에 나는 愛新覺羅 金씨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遼 金 淸의 전대에 고려에 복속하기를 거부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둘째 마의태자와 친구 김함보가 여진으로 입국하여 부족장이 되었다가
김함보(金函普)의 후손이 요 금 청의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흉노의 김일제(金日磾)가 한 무제와의 싸움에서 노예가 되었다
가 무제의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우고 한무제때 산동반도의 투후로 책봉
되었습니다. 그후에 그의 증손이 왕망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유수의 핍박
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갑자기 역사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가 훗
날에 신라의 건국 3시조 박 석 김씨 중의 김알지로 이어진다는 說입니다.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 BC 134~ 86)는
전한(前漢)때 흉노(匈奴) 사람으로 자는 옹숙(翁叔)입니다.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무제(武帝) 원수(元狩) 연간에 혼사왕
(渾邪王)을 따라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습니다. 곽거병(霍去病)
이 김일제를 포로로 잡아 천금인(天金人)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김씨 성
을 하사받았습니다. 처음에 마감(馬監)이 되었다가 나중에 시중(侍中)에
올라 좌우에서 입시(入侍)하여 수십 년 동안 과오나 허물이 없었기에 거
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었습니다. 망하라(莽何羅)가 모반을 일으키자
포박하여 주살하고, 이 공으로 투정후(秺亭侯)에 봉해졌습니다. 무제가
죽자 곽광(霍光)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들어 소제(昭帝)를 보필했습니다.

투후 김일제라는 인물이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관심을 끌게된 계기는
신라를 통일한 문무대왕릉비가 1819년 정조대왕때에 경주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이 되어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6명의 관리가 기록한 글이
2000년대에 발견되고, 1961년 경주에서 한 부인이 빨래판으로 쓰다가
재발견되었는데 상단은 소멸되고 하단만 남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풍양속으로 봐서 비석은 여간해서 훼손되지 않는데 그 비가
훼손이 심한 것은 사실의 기록에 어떤 하자가 있지 않았나 의심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전 추사 김정희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는 문무왕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가 그 비문에서
흉노족 출신 투후 김일제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의 증손 김당이 왕
망의 역모에 가담하였다가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그 후손이 신라의
건국 태조인 성한왕(星漢王)이 되었다는 뜻밖의 충격적인 사실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신이 김해 김씨인 추사로서도 자기의 시조에 관한 문제
이기때문에 고심끝에 추사는 그의 해동비고(海東碑攷)에 성한왕이
김알지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흉노 왕자 김일제가 신라왕가 김씨의 조상이란 것은
문무왕비에 그 내력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문무왕비에
성한왕이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라 나오고, 문무왕은 김일제를 나타내
는 투후의 7세손이자 신라 15대 (문무)왕이 된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또 여기선 성한왕을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으로 곧 김알지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라왕가가 흉노왕자인 김일제의 자손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가야국 김수로의 김해 김씨도 김일제의 동생인
김윤의 5세손 김탕을 시조로 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라왕실은 북방 흉노계통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기 시작했는
데 반대의견으로 신라 김씨가 그 당시 자신들의 왕권장악의 정통성과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 당시 신라보다 막강하던 흉노계통을 조상으
로 부각시켜 왕권장악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려고 의도적으로 관계가 없
지만 흉노왕실의 김일제계를 빌어왔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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