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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항해와 발견의 시대

鄭宇東 0 1475
대 항해와 발견의 시대

인간의 새로운 지평과 활동 무대를 넓혀주는
항해와 탐험의 역사는 곧 세계가 확대되어 온 과정이기에, 세계사의 큰
흐름을 더듬어 알수 있는 재미있는 모험의 이야기와 심화된 지식의 보고가
됩니다. 자원의 부족과 정보의 필요는 발명과 발견의 제일동인이 됩니다.

서쪽 지평선 너머로 다른 문화권과 통하는 길을 낸 중국인들
신비의 동방을 꿈꾸며 닻을 올린 대항해 시대의 유럽 선원들
전대 미답의 내륙 오지, 사막과 빙하나 양극지에로의 탐험가들
드넓은 바다를 그 깊숙한 밑바닥까지 알고자 했던 학자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고 싶어 한 등반가들
구름 위를 가로지른 최초의 열기구와 비행선과 비행기 조종사들
인류 최초로 달을 밟았던 우주인들은 위대한 파이어니어들입니다.

유럽에서는 십자군 이래로 이슬람 세계와의 동방 교역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해 아시아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아시아의
물산, 특히 육류의 조미와 보존에 빠뜨릴 수 없는 향신료는 산지인 아시아
에서는 헐값이지만 유럽에서는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팔렸습니다.
유럽인은 아시아와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새 항로의 개척에 나섰습니다.
대서양에 접해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기독교
세계의 확대와 동방의 부를 구할 목적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으로의 대항해
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희
망봉을 지나 인도 항로를 열었고,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
다. 그리고 바스코 다가마가 동쪽으로 항해한 것과는 달리 마젤란(1480경
~1521)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아시아로 가는 꿈을 실현하였다.

마젤란은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포루투갈의 항해자입니다.
포루투갈령 인도 총독의 부하로 동남아에서 근무하였고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서도 일하였습니다. 이후 1517년 포루투갈을 떠나 에스파냐로
갔습니다. 1519년 국왕 카를로스 1세의 승인을 얻어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해서 몰루카제도에 이를 계획으로 선박 5척을 이끌고 세비야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대서양을 지나 남아메리카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 해협
을 빠져나와 대양에 이르자 이곳을 마젤란 해협과 태평양으로 명명하였
습니다. 이곳에서 3척으로 줄은 함대를 이끌고 3개월 간 태평양을 항해
하여 1521년 괌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후 필리핀 군도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에서 원주민과 전투 중에 세부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마젤란 함대 중
에서 1척 만이 1522년 세비야로 귀향하였습니다.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사망하였기때문에 완벽하게 세계 일주를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가 포르투갈의 함대에 있을 때 아프리카 희망
봉을 거쳐 필리핀 아래쪽에 있는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까지 온적이
있기 때문에 전 지구를 한 바퀴 돈 첫 지구인으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젤란의 항해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아메리카와 아시
아가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대륙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젤란이 중도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를 이어 빅토리아호의 항해를 지휘하여 귀국한 선장 엘 카노가 왕실
로부터 실질적인 "최초의 세계일주자" 라는 자랑스런 칭호를 받았고
심지어는 마젤란의 노예-통역자이며 항해의 동반자였던 헨리 드 블랙
(Henrik de Malaka)을 세계일주 항해자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100여년전 대함선단을 이끌고 전세계에 위력을 떨치던
명나라의 정화(鄭和)가 지휘한 대명상선단이 선박의 크기나 선원들의
규모로 보아서 최초의 세계일주자라고 하는 이설도 있습니다.

중세는 르네상스로 끝나지 않고, 18세기의 프랑스 혁명까지 계속된다
고 보고 있습니다. 15세기의 지리상의 발견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7세기의 과학혁명과 18세기의 계몽사상 등에 이어져서 중세의 끝을
맺고,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활동무대를 넓혔고, 과학지식과 기술의
발달로 사고방식에 일대전환을 가져 온것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학
설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체로 중세의 끝을 17, 18세기로 늦
추는 것이 최근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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