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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양주동 박사

鄭宇東 0 2669
무애 양주동 박사

양주동(无涯 梁柱東 1903~1977) 박사는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황해도 장연에서 보냈습니다.
본관은 남해(南海)이고, 호는 무애(无涯)입니다. 아버지는 원장(元章)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입니다.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
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로
부임하였다가 일제말 이 학교의 폐쇄로 그 자리를 물러나 1940년부터 경
신학교(儆新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광복을 맞았습니다.

광복 후에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1947), 중간에 수년간 연세대
학교 교수로 옮겨 있었던 것(1958∼1961)을 빼고는 종신토록 동국대학
교에 헌신하였습니다.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
았으며,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학술원회원으로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인 및 문학이론가로서 문단
에서의 활약이 화려하였으나,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부터는 주로 고시
가(古詩歌)의 주석에 전념하는 국학자로 변신하였습니다.

이후, 신라의 향가를 연구한 <朝鮮古歌硏究>와 고려가요의 연구서
<麗謠箋注>등 대저를 남겨, 후학들에게 일본학자(오꾸라 신뻬이 :
小倉進平)들보다 뒤쳐진 이 방면의 연구에 분발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고, 국어국문학계에 크나 큰 선구적 공헌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가연구에서 부가적으로 얻은 소득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말의 어원에 대하여 그 연구성과를 넘어서기 어려운 우리
옛말의 보물창고입니다. 우리 말의 뿌리를 캐내는 데 있어서도 큰 길잡
이가 되는 책으로서 우리문화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 밖에도 시집으로 <조선의 맥박> <무애시문선>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T.S 엘리엍> <서양명시100선><세계기문선>이 있습니다.

그는 박람강기하고, 재기발랄하고 유머러스한 그야말로 스스로를 자랑
하여 걸어다니는 "人間國寶 1호"로 칭한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文酒半生記>와 <人生雜記>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六堂과 露山과 无涯는 우리나라의 3대 天才라 일컬어 집니다.
이들의 불꽃 튀기는 대결과 끈끈한 우정은 재미있는 일화들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들의 외우기 대회에서, 무애는 단어를 문장화하는
암송비법을 공략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조기 명태 홍어 복어 북어 추어- - -
등의 생선만 나열하니 말 잘 만드는 노산도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평양숭실전문에서 무애와 김동진은 사제간으로 만납니다.
무애가 친구 노산의 연시조 10수를 가르쳤고, 이를 배운 김동진에 의해
명가곡 가고파가 탄생하고 그후 40년만에 후편까지 완성되었습니다.
 
동경 유학시 여대생과의 연애에서 호랑이 사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사연을 성경의 구절로 고백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연애의 성공에서 결
혼으로 골인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연애시의 백미 雅歌書의 인용은 또
얼마나 빈번하였을지 안 봐도 뻔합니다. 
 
인기 강사로 여러 곳에서의 강연중 같은 주제가 되풀이 된다는 한 학생의
항의에 소뼈도 서너번 우려야 제맛이 나고 게다가 인간국보의 말을 한번
더 듣는 것은 특별은총이라고 한 응구첩대는 정말 일품입니다.

중국 고전을 강의중 할말을 잊은 무애는 한동안 당황하다가 선생인 자기
조차 모르는 이름은 그다지 중요할게 없다고 낯뚜껍게 선언하고 곧 사태
를 수습하여 학생들의 박수까지 받았습니다.

어려서, 어느 상가(喪家)에 갔다가 상주가 소위 ‘곡’을 하는데, 한편으로 여
러 사람에게 조상을 받으며, 한편으로 부의금 수입 상황을 집사자에게 물어
보며, 또 가인들에게 잔일 기타 무엇을 지휘하며,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나
면 또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것이 하도 우스워서 그야말로 돌연히 하
하하하’ 웃어버렸습니다. 그래 동리 늙은이에게 단단히 꾸중을 듣고 자리
를 쫓겨나와 뒷산에 올라 또 한바탕 남은 웃음을 실컷 웃은 일이 있습니다.
인생은 심각하게 살면 한없이 심각할 수 있지만 가끔은 우리를 얽매는 주변
의 눈치와 자신을 조이고 있는 근엄한 양반 자세를 벗어던지고 싱겁이가 되
고 까불이가 되어, 지나는 아이들에게도 우스개를 던지는 사람이 되어도 좋
습니다. 양주동 박사는 윤리고 예의범절이고 팽개치고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직하고 배짱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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