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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강연을 듣고

鄭宇東 0 1799
김용택 시인의 강연을 듣고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시인의 "시가 내게로 왔다"를 동네 도서관에서 들었습니다.
김시인은 섬진강가 임실에서 나서 자라 모교 덕치 초등학교에서 40년을 교사로
가르치다 학교를 나와서 지금은 도회지 전주로 나와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강연을 시작하며 앉으면서 서서 하나 앉아서 하나 마찬가지라 하며 웃기시는데
정말 키가 그렇게 작았습니다. 시인의 인생여정과 진정이 담긴 강연을 듣고 나니
그는 어느덧 세상의 누구보다 더 큰 키다리아저씨로 변해 있었습니다.

시인의 시학강연은 문학강연이라기보다 인생이야기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시인은 극히 일상적인 빗소리 듣기부터 시작했습니다. 비가 와서 낙숫물지는 소
리를 들으면 넓은 잎엔가, 두터운 잎에 떨어지는가를 알고, 좁은 잎엔가 얇은 잎
에 떨어지는가를 가름할 수 있고 그 러한 소리들의 오묘함은 바로 자연의 음악이
된다 하였습니다. 또 비가 오는 때의 관찰자의 상황에 따라 더 (머물러)있으라는
이슬비도 되고,  이제는 미련 없이 (떠나)가라는 가랑비로 예언해 줍니다. 

시골의 단층집에서 도회의 아파트로 옮겨온 그의 관찰도 독특하고 특이합니다.
12층에 살아보니 이제까지 오던 비가 지금은 비가 내려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는 눈도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내려 가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실험과 관찰은 
어디서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됩니다. 나무가 자라는 높이까지의 층에서 살아보고
지층에서 살며 정원의 꽃과 나무들을 관찰하며 살았습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인은 저층에서 필시 흙냄새에도 코를 벌름거렸을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청각등 감각기관을 훈련시키며 따뜻한 마음으로 자연을 관찰하며
섬진강을 비롯하여 온가지 것을 포함하는 자연교과서를 통하여 위대한 자연의
스승에게서 배워서 가만히 두어도 자연스럽게 시인이 될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됩니다. 시인의 감수성은 남달랐습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여느 사
람과는 달리 그만의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대하였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자산이었고 하늘로부터 물러받은 천품이었습니다.

시인은 어릴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게 느껴졌고
시인의 어린시절은 도시고 시골이고 할것 없이 읽을 책도 적고 놀이기구도 마땅
한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한줄 글에서 한편의 재미나는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마법의 영화가 있어서 이것을 통하여 문화-문명의 혜택이 적은 시골
에서마나 그런대로 사회를 배우며 인생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베스트 셀러 저자 로버트 풀검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
서 배웠다" 하여 어린시절에 배우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 김용택 시인은 이른바 현대의 종합예술인 영화를 통하여 세상만사 문물과
모든 것의 이치와 원리를 배웠다 하니 참으로 수긍이 가지는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영화를 통해서 젊은 시절의 왕성한 지식욕을 해갈하고,
짧은 줄글이 한편의 영화가 되게하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와 소설에 입문하고,
사회비평적인 영화에서 정의와 청소년 문제, 빈부문제등 사회적인 이슈에 눈뜨고,
첨단 과학사조를 배경으로 한 기후-친환경등 미래지향적 안목을 갖게 되었답니다
말하자면 영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 종교 과학 등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여 그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비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시인의 영화에 대한
믿음은 너무 절실해서 시인에게 종교가 있다면 아마 영화교라 대답할것 같은 생각
이 듭니다. 나도 기꺼히 또 한사람의 영화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김용택 선생의 모교는 임실의 덕치 초등학교입니다.
그는 할수만 있었다면 덕치학교에서만 근무하고 싶었지민 근무규정상 5년마다
인근학교로 옮겨 한 1년 있다가 다시 오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 하다가 40년만에
정든 모교 덕치학교를 떠나 교직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간 김선생이 맡은 학년은 주로  2학년 이었습니다.
2학년은 순수하고 순진합니다. 한 예를 들어, 100m 달리기를 하면 3학년만 되어
도 발랑 까져서 뒤로 처지면 꾀를 내어 포기하고 마는데 2학년때는 처지건 말건
우직하다고 할 정도로 끝까지 뛰어 내고 맙니다. 그만큼 순수하고 순진합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순진하던 2학년 대성이도 세파에 시달려 달라져서 김선생의 마음
을 아프게한 적이 있습니다. 출타했다가 대성이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장가가는 날
만났는데 고개만 숙여 절하고는 신부쪽으로 사라져 버려서 얼마나 서운 하든지 눈
물이 다 나왔답니다. 적어도 선생님하고 달려와 와락 껴안을 줄 알아는데 말입니다.
이런 서운한 감정은 차를 타고 사모님과 집에 오는 중에도 되살아 나서 2학년때
대성이에게 과자 사 주고, 차 태워 주고, 잘 대해 준것이 다 부질없는 짓인듯 하여
"대성이 그놈 과자도 사주지 말고, 차도 태워주지 말걸" 하는 생각도 잠시뿐 이내
어엿한 신랑 대성이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기를 비는 스승으로 돌아왔답니다.

매너 모드로 설정한  선생가방속의 휴대폰으로 사모님의 전화가 왔다는 말씀에
나는 오래전에 시인의 산문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선생이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서 전기를 끄고 잠을 청하려고 소케트의 스위치를
돌려 끄는걸 몰라서 달궈진 백열등을 잡고 돌려 뽑다가 뜨거워 혼이 났다는 이야기
가 생각나서 오늘의 훌륭한 강의와 현대문명이기의 숙달된 이용법을 구사하는것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수행과 세련된 매너를 보고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사모님은, 선생이 한때 마음속에 두었던 " 그 여자네 집" 의 그 여자
를 만나면 " 제가 김용택시인의 아내입니다" 라고  분명한 경고성 의사표시를 하는
현숙부인이 되어있다 합니다.


ㅡ 20100830 ㅡ 鄭宇東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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