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신요칼럼
신요칼럼
 

최초의 연극전문 ㅡ 동양극장

鄭宇東 0 1837
최초의 연극전문 ㅡ 동양극장

한국연극사의 시대 구분은
    ① 고대(삼국 이전에서 신라말까지),
    ② 중세(고려 일대),
    ③ 근세(조선 일대),
    ④ 현대(1902년 이후 현재까지)로 크게 넷으로 구분하고,

한국 연극의 장르를
    ① 가면극,
    ② 인형극,
    ③ 창극(唱劇),
    ④ 신파극(新派劇),
    ⑤ 신극(新劇)으로 분류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 1908년(융희 2년) 7월에
원각사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새문안교회 터에 세워졌습니다.
궁내부 직할의 국립극장이었다는 설과, 이인직이 궁내부와 협의하여
협률사(協律社)를 민간극장으로 양도받아 원각사(圓覺社)를 개설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로마식 극장을 본떠서 건설, 수용인원 2천 명이었으며,
첫 상연물은 11월 15일에 상연한 <은세계(銀世界)>로서, 이는 신극사상
최초의 신극이었습니다. 그 후 <설중매(雪中梅)> <춘향가> <수궁가(水
宮歌)> 등을 공연하는 등 원각사의 신극운동은 약 1년 반 계속되다가
1910년에 들어 막을 내렸습니다.

뒤이어 1923년 5월 경, 토월회(土月會)가 발족하였는데 당시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승희(朴勝喜)의 주도로 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
이서구(李瑞求)·박승목(朴勝木)·김을한(金乙漢)·이제창(李濟昶) 등이 시
작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대예술 지망의 박승희를 제외하고는 문학
의 김기진, 의학의 박승목, 조각의 김복진, 미학의 이서구, 영문학의 김을
한 등 모두가 연극과는 거리가 멀어 처음에는 예술전반에 걸친 문예서클
로 시작하여 훗날 박승희가 점차 연극주도의 극단으로 개편하였고
톨스토이의 부활과 마이어 푀르스트의 알트 하이델베르크를 상연했으며
뒤에 극단명을 태양극장(太陽劇場)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초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東洋劇場)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극장으로 객석 600여 석이고
1935년 10월 평양 출생의 유지 홍순언(洪淳彦)과, 배구자(裵龜子)부부의
악극단을 이끌던 배구자가 당시 19만 5000원을 들여 지은 국내에 유일한
연극전문 극장이었습니다. 이 극장은 회전무대 ·호리존트시설 등을 갖추고
1935년 11월 1일 개관공연의 막을 열면서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이 동양극장의 출현으로 당시 연극상설극장의 건립을 염원하던 많은 연극
인들의 숙원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연극을 자체적으로 소화하기 위하여
일반연극의 청춘좌, 사극 중심의 동극좌(東劇座), 희극 중심의 희극좌 등
전속극단을 두고, 연중무휴로 연극을 공연하였습니다.

상기 3좌의 단원의 면면울 보면
청춘좌에는 창단 당시 남자배우로는 서월영(徐月影)‧박제행(朴齊行)‧
        심영(沈影)‧황철(黃澈) 등이 소속되었고
        여자 배우로는 김소영(金素英)‧김선영(金鮮英)‧지경순(池京順)‧
        남궁선(南宮仙)‧차홍녀(車紅女) 등이 있었습니다.
동극좌에는 변기종(卞基鍾) -신은봉- 하지만(河之滿)‧송해천(宋海天)
        김양춘- 한일송- 김영숙- 박총영- 서일성- 서옥정- 이윤옥이 있고,
        연출에는 이서구가 유명하였습니다.
희극좌에는 전경희(全景希)‧석와불(石臥佛)‧손일평(孫一平)‧
        김원호(金元浩)‧김종일(金鍾一)‧송문평(宋門平)‧ 이정순(李正順)‧
        최영선(崔英善)‧김혜숙(金惠淑)‧강정숙(姜貞淑)‧김소조(金小鳥)
        등이 참여하였습니다.
1936년 9월에 동극좌와 희극좌를 합쳐 "호화선"으로 개편하였으며
1941년 11월에 인원을 보강하여 성군(星群)으로 확대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동양극장은 부설 연극연구소를 설치하여 신인을 양성, 많은 인
재들을 연극계와 영화계로 내보냈으며, 전속극단 단원의 보수도 이제까지
의 일급 또는 무급제도를 없애고 월급제도를 실시하는 등 획기적인 운영
방식을 채택하여 연극인의 사기를 높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동양 극장에
는 많은 연극인이 모여들어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대중연극의 메카
로 군림했는데, 1950년대 이후 한때 영화관으로도 쓰이다가 1976년 2월
폐관되고, 1995년 철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연극사에는 이 밖에도
1911년 임성규의 新派劇을 위주로 한
革新團에서는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를 상연하여 인기를 끌었고
尹白南의 文秀星과 李基世의 唯一團이 신파극단으로 유명하고
1921년 동경 유학생 김우진 등이 신파극 지양 新劇運動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극계는 민립극단(民立劇團) · 조선극우회(朝鮮劇友會) · 취성좌
(聚聖座) · 조선연극사(朝鮮演劇社) 등의 상업극단과
산유화회(山有花會) · 신흥극장(新興劇場) 등의 실험적인 신극 단체와
염군(焰群) · 불개미극단 등의 경향극단(傾向劇團)들이 이중 삼중 구조를
이루고 분단상황 아래서 이념갈등을 빚었습니다.

劇藝術硏究會는 實驗舞臺를 운영 홍해성이 번역극(고골리의 검찰관)을,
유치진이 창작극을 다루었고, 1938년 극연좌(劇硏座)로 개칭하였습니다.
일제강점 말기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어용단체로 이용되었고
해방후 1949년 10월에 중앙국립극장의 출범이 있었고
대학극회출신으로 출발한 制作劇會 등이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이 종식될 때까지
연극계에도 좌우익 투쟁의 혼란기가 계속되었으나, 1949년 10월에는
중앙국립극장이 설립되고, 1950년 그 개장공연에 들아가 모처럼 일어났던
연극 중흥의 불길도 6 · 25사변으로 일시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변 중에도 피난지 공연과, 일선 국군 위문 공연 등으로 극단 신협
(新協) 등의 연극 활동은 계속되었고, 1962년에는 중앙국립극장이 공보부
에 이관되면서 재출발하였고, 드라마센터가 같은 해에 개관되었습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국립극단 · 신협 · 실험극장 · 극단 산하(山河) · 자유극장 ·
민중극장 · 동아극장 · 극단 드라마센터 · 극단 가교(架橋) · 여인극장 ·
제작극장 등 몇 개의 주도적인 전문 극단이 공연을 계속하고 연극 중흥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대학 연극도 6 · 25 이전과 다름 없이 활발하여
판소리(창극) · 가면극 · 인형극 등의 전통극 보존과 계승을 위한 노력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 연극의 오늘의 과제는 고도로 발달한 극장 예술의 매커니즘과 기술을
지니고, 전통 예술을 섭취하여 서양 연극이 아닌 한국 연극의 장르로서의
신극 즉 민족극을 수립하는 것이겠습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