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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윤리학

鄭宇東 0 1460
분노의 윤리학
영화의 제목 치고는 너무 현학적이고 철학적입니다.
신예 박명랑 감독-대본, 이제훈. 조진웅. 김태훈. 곽도원. 문소리 주연으로
2012년 최근에 개봉된 영화로서, 베를린국제영화제 출품작이라 합니다.
살인 강간 도청 스토커 사채 불륜등 세상의 죄악을 저지르는 평범한 얼굴
들 이면에 숨어 있는 악의 본색과 진상을 보고 분노하는 군상들이 또 다른
죄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는 분노의 고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줄거리를 읽으면서 마치 일본의 구로다 아키라(黑田煇) 감독의 아쿠다카
와 류노스케의 원작 "라쇼몽(羅生門)"에서 제목을 따오고 "덤불숲속에서"
의 내용으로 전개되는 영화 라쇼몽의 반전과 혼돈을 배워와서 만든 영화
같다는 생각을 언뜻 하였습니다.

한 여대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네 남자와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하는데
남한테 피해는 안 입혔지만 남몰래 이웃집 여대생을 도청하는 남자,
그 여대생과 불륜을 저지르는 번지르한 교수의 신분을 가진 남자,
그 여대생에게 사채를 빌려주고 여자를 이용하는 악덕 사채업자,
그리고 여자와 헤어졌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스토킹하는 전 남자친구,
그리고 이 4명의 남자들의 못된 모든 짓을 알고 있는 교수의 부인입니다.

평소 누구보다 평범하고 점잖은 얼굴을 한 채 살아왔던 이들은 살인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분노를 발견하고, 죽음의 책임을 서
로에게 돌리기 시작합니다. “남한테 피해 준 적 없어.” “돈만 벌면 돼.” “사
랑해서 그런 거야.” “아내만 모르면 돼.” 이기적 욕망으로 자신을 가리고 서
로를 응징하려 드는 네 남자는 이제 악질적으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자신만은 순결하다고 주장하는 네 사람 앞에 또 다른 여인이 나타납니다.
살인보다 불륜이 더 참을 수 없는, 자존심을 다친 것이 무엇보다 불쾌하고
화가 난 여자는 묻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서로를 심판하
겠다고 나선 이들이 만들어 낸 분노의 연쇄 고리 속에서 사건은 점점 예상
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성과 잘못을 알기보다는 타인의 악성에 분노하기를
잘 합니다. 이리하여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분기로 탱천해 있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의 폐허로 모든 희망을 상실해버린  Lost Generation 과
2차대전 후의 피폐와 절망에 반항하고 분노하는 Angry Young Men 말입
니다. 누구에게다나, 무엇에다나, 아무일에다나 성난 얼굴로 대하는 이들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 합니까?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스스로를 초인으로 생각하는 라스콜리니코프
는 대학을 중퇴하고 꼭대기 다락방에 머물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사회에
해악만을 끼치는 전당포 주인 노파를 버러지만도 못한 해충처럼 살해하고
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겠다는 요량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나 뜻
하지 않게도 마음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고민하다가 이해심이 많은
다정한 소냐의 훈수로 사법기관에 자수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납니다.

악마도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성경을 읽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사기위하여 사악한 흑마술을 쓰서
영토를 확장하고 화폐를 찍어 경제를 부흥시키는 선한 사업을 벌입니다.
성경을 읽기 위하여 촛불을 훔쳐도 좋은가는 잠시 판단을 미루어 둡니다.
다만, 악마라도 스스로의 악마성을 부끄러워 숨기고 변명하는 최소한의
염치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고매-고원한 차원의 요구이며 이상인가요?
악마가 악마이기를 숨기고 나아가 악마이기를 거부하는 마당쯤을 기다
립니다. 최소한도로 양보한다 하더라도 악은 악이고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라는 악의 순정성만큼은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분노가 팽배하고 판을 치는 사회입니다.
경제학은 1%의 가진자에 대한 99%의 無産者의 질시와 분노속에
법률학은 가해 범법자에게 분노하는 피해자의 응징의 바람속에서
정치학은 권력자에 대한 힘 없는 다수 민중의 항의와 분노속에서
문학 예술은 고전주의에 대한 각종 실용 현대사조에 함몰되어 버리고
의학은 너무 육체건강주의에 빠져 정신건강을 해치는 지경에 이르렀고
철학은 강단학자에 대한 시정인의 불신과 분노속에 표류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분열되고 갈라지는 아픔속에서 영일이 없고 평화가 없습니다.
분노와 화를 다스리고 통합과 평화를 불러오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공자는 제자 안연이 後生可畏-靑出於藍으로 뛰어났음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천로(不遷怒)와 불이과(不貳過)한 미덕을 칭찬하였습니다.
자기 마음속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자기가 저지른 허물
을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노여움을 관계없는 남에게 퍼질러대었으며
나는 지금도 노여움으로 남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음은 아닌지?
나는 똑같은 허물 때문에 위험한 벼랑에 몰리기를 몇번이나 하였으며
나는 뉘우칠 줄 모르는 아집에 갇혀 구각을 탈피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를 차분히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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