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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문화의 꽃 대중가요와 그 스타들

鄭宇東 2 3252
민중문화의 꽃 대중가요와 그 스타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중국 역사서에서도 가무을 즐기는 순박한 민족으로
기록할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풍류와 예악을 아는 문화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과 풍토속에서 살아 온 우리 민족에게 특히 민중의 애환을 담은
대중가요는 일부 인텔리겐챠나 거룩주의 크리스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었
지만 기실은 그 시대 일반민중문화의 정수요 꽃이였습니다. 이에 대한 명칭
도 초창기에는 唱歌로 출발하여 한때는 流行歌로 불리다가 작금에 와서는
大衆歌謠로 정당하게 평가하여 이 이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는 100여년전 그 태동기인
1908년경 당시의 명창들의 판소리, 민요 등을 레코드에 담아 내면서부터이
며 이때는 대중가요라고 할 수 없고 주로 전문분야의 사람들만 취급하였고,
대중가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대략 1925년 즈음 일본에서 유
행하던 미국 또는 일본의 노래를 번안한 "이 풍진 세월"이란 가요였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미국 선교사인 Jeremiah Ingalls가 편집한 영국 성가 Garden
Hymn 의 When We arrive at home 을 편곡하여 번안한 "새하얀 후지산 고
개"의 재번안곡으로 우리나라의 직업가수 1호인 채규엽(하세가와 이찌로)에
의해서도 "희망가"란 제목으로 녹음 취입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는
1925년에 발표된 정사인 작곡, 안기영 독창의 창가 "내 고향을 리별하고" 를
창작대중가요의 시초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이 노래는 클래식 가곡
음반으로 분류해야 마땅할 성질의 노래이기 때문에 논외로 치고 일반적으로
우리의 창작대중가요의 시초는 김서정 작사에 김영환이 작곡하여 1929년에
이정숙이 취입한 영화음악 낙화유수(강남의 달밤=>강남달)이라고 합니다.
일설에는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를 그 시초라고 말하는 설도 있습니다.

창가로 태동하여 본격적인 조선유행가의 효시가 된 이래
처음으로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왕평-작사 전수린-작곡의 "황성 옛터"는
이애리수(本:이음전)를 조선인의 연인으로 사랑 받게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곡명이 "荒城의 跡"이었던 이 곡의 작곡자 전수린은 바이올리니스
트였으며 가창자 이애리수는 이밖에도 "카추샤의 노래, 고요한 장안, 에라
좋구나" 등의 이 작곡자의 명곡들을 노래하였습니다.

아무튼 그 시대의 대중가요들은 슬프고 애달픈 곡, 조국을 잃어버린 " 한"의
가사들이 거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쫓겨 온 만주의 드넓은 간도땅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민중들의 아픔속에서 우리 대중가요의 틀이 짜여졌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중가요의 초창기라 할 1930년대 일제강점기
의 비운과 고통을 노래한 트로트 가락에서 시작된 대중가요는 오랜 우리의
옛 전통처럼 시가 곧 노래요 노래부르는 시인 시조를 수록한 해동가요, 가곡
원류, 청구영언 등에서 이 가요 명칭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에는 일본 엔까의 압도적인 영향하에서
시대의 암울과 항일의 노래가 주류를 이루었고,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아 "귀국선"이나 "감격시대"에서 처럼
조국광복의 감격과 신천지 신시대 도래의 밝은 희망을 노래하였으며,
미군정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서양의 팝송, 째즈, 포크송, 록앤롤, 헤비메
탈의 홍수를 맞았다가 최근에는 신세대들의 힙합, 랩과 레게, 비보이의 춤
의 세례가 우리 기성세대와 청소년을 상대로 강하게 타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중가요의 흐름속에서
초창기에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오다 현해탄에서 죽은 윤덕심의 "사의 찬미"
를 비롯하여 "홍도야 울지마라, 돈에 속고 사랑에 울고" 같이 구시대의 봉건
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여성의 인고와 원한을 주로 노래했습니다.
새로이 선을 보인 신파극단들의 막간 노래가 유행가의 대종을 이루던 이때에
는 기방의 재능있는 기생들이 가수겸 배우로 많이 진출한 것이 또한 이 시대
의 한 특징이었습니다.

이일은 우리에게는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아직도 뭇 남성에게는 미련이 남아 단념하지 못하는 꿈이 기생놀이입니다.
이러한 권번의 기생가수로 선우일선, 이화자, 이은파 등이 있었습니다.
* 선우일선은 평양출신의 신민요가수로
김안서 작시 / 이면상 작곡 // 꽃을 잡고
편 월* 작사 / 형석기 작곡 // 조선팔경가  * 왕평의 필명
 * 이은파에게는
김능인 작사 / 문호월 작곡 // 관서천리, 앞강물 흘러 흘러
조명암 작사 / 박시춘 작곡 // 파랑치마
 * 이화자는 민요에 능하여 민요의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조명암 작사 / 김영파 작곡 / 손목인 편곡 // 꼴망태 목동
조명암 작사 / 박시춘 작곡 // 목단강 편지 가 유명하였습니다.

왕년의 가수 진방남(本:박창오)은 가수로 첫 취입하는 일본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도 가지 못하고 슬픔을 울면서 노래한 "불효자는 웁니다" 를
비롯하여 "고향초, 고향만리, 사모곡"을 불렀는데 뒤에는 반야월로 예명
을 바꾸고 작사가가 되어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장의 여인, 아빠의 청춘,
소양강 처녀,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의 3천여 가요 노랫말을 쓴 우리나라
에서 가장 많이 만든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일본 식민통치의 암울한 시대에도 우리의 마음을 달래 주던 트로트 가요의
대표적인 세 가인으로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라는 삼대 산이 우뚝 솟아 있었
습니다. 마음씨 좋고 키가 큰 미남 고복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트로트
가수로서 "타향살이,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을 불러 망국백성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복수의 출세곡인 타향살이는 김능인(本:承應順)이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하였는데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카디온 주자였습니다.
고복수의 아내인 가수 황금심은 "삼다도 소식, 알뜰한 당신"을 불렀습니다.
 
본명이 강문수인 진주출신의 고음의 미성가수인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어진 부산항,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불렀는데 그는
특히 여인에게 인기와 염복이 많고 한편으로는 돈씀씀이가 짜서 별명이
"여인수" "돈인수"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그는 북쪽으로 끌려가 남편을 잃
은 외로운 이난영의 후견인이 되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진주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덧붙이면,
진주의 市歌라고도 하는 " 진주라 천리길" 은 조명암(本:조영출)이 작사하
고 이운정(본:李冕相) 이 작곡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월북으로 금지곡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다 합니다.

목포의 눈물을 불러 "눈물의 여왕"으로 불려진 이난영(本:이옥례)은
"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을 불렀으며 그의 남편 김해송은 고운봉
이 불러 술자리의 필수곡으로 히트시킨 조명암 작사 선창의 작곡자였으나
그가 월북한 후 처남 이봉룡의 이름으로 바뀌어 노래만 살아 남았읍니다.
이리하여 고복수 남인수 이난영의 삼인전성시대가 흘러갔습니다.

白年雪은 본명이 李昌民이며 "유랑극단"의 성공적 취입으로 데뷔하였으며
처녀림(本: 박영호) 가사에 그의 명콤비 이재호가 작곡한 "번지 없는 주막"
이 히트했습니다. 그리고 나화랑의 형 고려성(本: 趙庚煥) 작사, 이재호가
작곡한 " 나그네 설움" 으로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우리 백성에게는 나라
잃은 슬움을 달래주었습니다. 만년은 미국에 이민갔다가 이국에서 쓸쓸히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대표적인 항일가요로 유랑극단의
막간가수들이 불렀던 김용호-사 이시우-곡 "두만강 뱃사공" 은 후에 가수
김정구가 불러 유명해졌고 그의 평생 고정레파토리가 되었습니다.

이때를 전후하여 우리 대종가요계에는
이어서 성악을 정식으로 공부한 최초의 학사 가수인 현인(현동주)의 "신라
의 달밤"이 널리 불려졌고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외에도
외국곡 베사메무쵸를 잘 불렀는데 이 곡은 송민도가 부른 "눈물의 결혼식"
과 함께 광복이후 최초의 외국 번안곡으로 기록됩니다.

여고 졸업때 반야월 작사 나화랑(本:조광환) 작곡의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비가의 여왕" 이미자는 우리가요의 태생이 그런데도 왜색가요란
이유로 금지곡 수난을 당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여자의 일생, 아씨, 여로, 황혼의 불루스, 기러기 아빠"가 있고
우수를 깊게 깔고 심금을 흔들어 놓는 배호(배만금)의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비 내리는 명동"이 있고 자기의 운명을 미리 예감이
나한듯 "마지막 잎새"를 부르면서 불운하게 죽었습니다.

우아한 카리스마의 가희 페티 김(김혜자)이 부르는 "초우, 마이웨이, 사랑
의 맹세, 이별, 9월의 노래, 4월이 가면, 서울의 찬가,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은 영원히" 에는 전 남편 길옥윤의 작품이 많습니다. 본명이 최치정인
吉屋潤은 일본의 작가 요시노 노부꼬의 성과 다니자끼 쥰이치로의 이름에
서 따온 예명인데 평생을 색스폰으로 살다 죽은 영원한 에뜨랑제입니다.
죽은 후 발견된 "솥과 항아리, 노래 있기에" 등의 작품이 음반으로 나오기
를 그의 동생 치과의사 최치갑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패티 김과 맞먹는 인기를 누렸고
우리나라에 미니 스커트와 함께 귀국한 윤복희는 어릴때 슈샤인 보이를
불렀고, 가수와 작곡가로 "여러분"을 작곡하고 나중에는 목사로 변신한
윤항기 남매는 우리나라 원맨쇼의 선구자인 천재적 연예인인 윤부길과
배우인 고향선의 자녀로, 이들 연예인 가족들이 겪은 고난과 애환은 한국
연예사의 애환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아버지
윤부길은 "처녀 뱃사공"의 작사자이기도 합니다.

가수 조영남은 "세시봉"을 한국 포크송음악의 전도사라 평하였습니다.
세시봉은 송창식 이익근 윤형주로 구성된 trio였습니다. 멤버 이익근의 입
대로 남은 두 사람이 급조하여 무대에 선것이 twinfolio 였으나 오래 지속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조영남 등을 C'est Si Bon그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뒤이어 라나에로
스뽀, 뚜아에무아, 아니언스 등의 그룹과 솔로로는 한상일로부터 한대수
서유석 차중락 김정호 김민기 양병집 등이 활약하였고
여성으로는 한명숙과 포크 트로이카 양희은 박인희 이연실이 있습니다.

최희준은 서울법대를 나온 가수로 미8군 무대에서 닦은 실력으로 가요콩
쿨에 입상한 후 "하숙생"을 노래가 마치 철학인양 설교조로 불러 공전의
대히트를 거두었고 한때는 국회의원으로 의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이어 "친구"와 "허공"을 불러 국민가수라는 칭호를
받은 조용필은 가성도 바이브레이션도 구사하지 않고 복부에서 끌어 올리
는 순정한 음성으로 듣는 이에게 감동과 공감을 야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가히 우리가요의 철학시대를 열어준 선구자라 하여도 좋을 것
입니다. 특히 조용필은 가요계에 새로 풍미하던 팝, 재즈, 록을 혼용하여 노
래 불러서 종래의 트로트와는 차원이 다른 랩등을 가능케하는 가교적 역할
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정치적 사회적 특수성으로 저항가요의 장르가 있습니다.
일제 36년 식민통치에 대한 독립투쟁의식을 시작으로
초기 이승만정부의 난맥상과 독재정치에 대한 민주의식의 각성과
박정희 혁명군사정권 말기의 강권주의에 저항하는 민권의식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폭거에 용감히 대항한 광주민주화운동 등에서
우리는 치열한 저항가요를 부르며, 이에서 저항력을 북돋우었습니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 아침이슬, 상록수, 공장의 불빛, 늙은 군인의 노래"
와 이외에도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사노라면, 그날이 오면, 진달래, 벗이
여 해방이 온다, 광야에서, 꽃상여 타고" 등이 널리 불려졌습니다.

그리고 또 6.25 전쟁이후 한국 현대사의 최대비극으로 평가되는
광주민주화운동 때에 희생된 윤상원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계기로 만들
어진 백기완이 작사하고 김종율이 작곡한 " 임을 위한 행진곡" 이 80년대
저항가요의 대명사처럼 불려졌고, 아직도 작사자 작곡자가 알려지지 않은
"5월의 노래" 가 신군부의 잔악상과 희생자의 처참함을 적나라하게 폭로
하고 있으며 또 김지하의 저항시 " 타는 목마름으로" 가 이성현의 작곡으
로 총칼에 맞서 시위에 나선 젊은이들에게 많이 불려졌습니다.

1950년 동족상잔의 6.25 전쟁은 1000만 이상의 이산가족을 양산하였습
니다. 당시 전체 인구의 1/3을 넘는 숫자였습니다. 1983년 6월 30일에
방송한 KBS 이산가족 찾아주기 프로그램은 온 나라에 눈물바다를 만들었
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란 프로그램 주제가는 원래 신영균,
최무룡이 주연을 맡은 "남과 북"의 주제가로 한운사 작사, 박춘석 작곡에,
곽순옥이 1965년에 불렀고 이후 페티 김이 리메이크한 가요였습니다.
이와 같이 가요가 시대의 산물인 증좌인 것은 특히 요즈음 이슈로 되어 있
는 독도가 가요나 가곡의 주제로 되어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조용필 이후 우리 의 대중가요계는
새로 등장한 박미경, 김건모, 조성모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더욱 고조
시킨 록과 랩-레게 그리고 뮤직댄스, 비보이의 춤은 한국 대중음악의 컬러
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랩은 일부 평자가 언어의 설사로 혹평 
하지만 이제까지 눈물과 사랑타령 밖에 없던 우리가요에 사회성 짙은 가요
의 한 장르로 정착하여 구시대의 사랑타령 일변도의 고질병에서 탈출해
메시지 있는 음악으로 되살아날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신선한 매력입니다.
이리하여 기성세대는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과 빠른 리듬과 템포에 적응하
지 못하여 이른바 문화적 쇼크를 겪으면서 신세대와 소통의 경로를 차단
당한채 소외감과 무력감에 빠져 도저히 이루워 낼수 없는 불가능의 트로트
복고를 꿈꾸며 반란을 꾸미고 있습니다.

내가 이질감과 소외감을 절감하는
요즘 등장하는 가수들은 이름도 모르겠고 귀에 익고 눈에 익은 가수들은
남자 가수로는 남진 나훈아 김수철 김태곤 정태준 김현식 이광조 이문세
조동진 김두수 김현철 설운도 송대관 태진아가수가 있고
여성가수로는 트로트의 삼총사 김세레나 김부자 조미미와 한명숙 현미
정훈희 김상희 심수봉(심민경) 이선희 주현미가수 정도가 생각납니다.

끝으로 이색적인 가요사의 한 가닥을 풉니다.
우리 한국가곡의 대표곡의 하나인 "가고파"와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김동진
선생은 당시로는 이단이라 한 영화음악을 쓰면서 "저 구름 흘러 가는 곳" 의
명가곡을 썼고 영화 백치 아다다에서 그 주제곡 "백치 아다다" 를 작곡하였고,
또 김래성의 소설 청춘극장을 토대로 한 영화 "산 넘고 물 건너"에서
"축배의 노래" 라는 오늘날에도 즐겨 부를 수 있는 가요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 을 작곡한 최영섭선생은 자신이 쓰고,
가수 태진아가 편곡하여 불러 히트한 "가버린 사랑" 을 필명 고운산 작사 /
예명 박인섭 작곡으로 발표하였는데 노래방에서 많이 불려져 난산의 가곡
보다 더 많은 저작권수입을 벌어오는 효자노릇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정작 크게 놀라는 사실의 하나는
우리가곡의 효시가 되는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선생이 대중가요 "백마강
의 추억(강남월 작사)" 등 14곡을 작곡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친
근히 다가갈 수 있는 신민요운동을 벌이어 ㅡ김동진선생도 이와 비슷한 취
취지의 신창악운동을 벌인바 있습니다만ㅡ  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 등 신민
요도 7곡이나 작곡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사 알기로는 민요 "노들강변"은 옛
부터 전해 오는 민요의 하나로 알고 있지만 실은 만담의 개척자인 신불출이
작사하고 문호월이 작곡한 이러한 신민요운동의 산물의 하나입니다.
2 Comments
鄭宇東 2013.12.09 20:54  
영화계의 눈물의 여왕 전옥(전득례)과 강흥식의 "처녀총각"의 인기와 
찢어지는 아픔을 잉태한 關釜연락선의 정경을 그린 "연락선은 떠난다"
의 장세정의 인기는 새로운 신데렐라의 탄생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파천 2016.02.25 22:59  
우리의 창작대중가요의 시초는 김서정 작사에 김영환이 작곡하여 1929년에 이정숙이 취입한 영화음악 낙화유수(강남의 달밤=>강남달)이라고 합니다. <---- 정우동 님의 강남달 소개글입니다.

1917년생이며 일제시대 당시 여학교를 졸업하시고 2012년 타계하신 제 어머니에게 배운 강남달 가사입니다.

강남달

1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 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우리

2.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 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