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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訓民正音

鄭宇東 0 1801
한글 - 訓民正音


* 훈민정음/한글의 창제는
그야말로 문자의 독립을 이룩한 우리 민족문화상 가장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한자를 사용했으나  말과 글이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웠고
배우기도 쉽지 않아 문자생활에 많은 불편을 겪어왔습니다. 향찰이나 이두 구결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우리말을 정확히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속에서, 세종 25년(1443)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각고
의 노력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세종 28년(1447)에 훈민정음을 반포했습니다.
한글은 세계문자 가운데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인 표음자모문자로 17자의 자음과
11자의 모음으로 모두 28자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세종이 밝힌대로 배우기 쉽고,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였고
한글창제에 함께 참여하였던 정인지는 바람소리, 학울음, 닭 우는 소리와 개 짖
는 소리도 모두 다 적을 수 있는 (완벽한)문자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 한글의 사용과 보급
세종 26년(1444) 최만리 등이 훈미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반발이
컸습니다. 한글이 세종 25년에 창제되고 그 반포가 세종 28년으로 미루어진 이유
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고루한 선비들에 의하여 새 문자를
만드는 자체가 오랑캐의 짓이라고 반대하였습니다. 이는 유학과 한문을 숭상하는
문화적 사대주의의 소산이라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이를 활용하는데 힘썼습니다.
최초로 편찬한 한글서적은 <용비어천가>인데 125장의 악장체로 조선 건국의 연
원과 위업을 찬양한 내용이었습니다.
불경을 번역한 <석보상절>은 소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감탄한 세종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이 두 책을 하나로 합친 것이 <월인석보>입니다.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며,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도 한
글로 편찬했습니다. 또한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삼강행실도> 같은 책이 한글
로 편찬되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많은 불서를 번역했습니다.
한글은 부녀자들이 편지를 쓰는데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암클이라는 호칭도 이 때
문에 붙혀졌습니다. 그 외에도 농민들이 보는 농서와 대외적 비밀유지가 필요한
병서 등을 한글로 썼습니다.

* 한글의 시대적 사명
한글은 창제당시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명기한대로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향상시키
려는 세종의 애민정신의 발로로 창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통치자의 편의
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목적은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는 서리들에게 한글 시험을 치르게한 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또한 <삼강행실도> 같은 책을 한글로 편찬해 백성들에게 보급하고
그들을 유교적으로 교화함으로써 성리학적 통치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글은 창제 초기에 "통치의 수단"으로서 크게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쉽게 익히고 사용하므로써 백성들은 점차로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글의 역할은 '통치의 수단'에서 '저항의 무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허균의 <홍길동전>의 저술과 유포, 잦은 괘서 및 벽서사건은
이러한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때는 탐관오리의 횡포를 고발하는 벽서가
나붙자 한글책을 불사르고 한글의 사용을 금지시켰던 사건만 보더라도 한글이 서
민의식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한글의 이름에 대한 기록으로는
<세종실록> 25년 12월 쪽의 한글의 공표에 대한 다음 글이 가장 첫 글입니다.
“ 이달에 임금님께서 손수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글자는 고문을 본받았고 초성
과 중성과 종성이 나뉘어져 있으며, 그것을 합한 뒤에야 글자가 이루어진다. 무
릇 문자에서 우리나라 속말까지 모두 적을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쉬우
나 돌려씀이 그지없다.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새로 만든 글자의 이름을 訓民正音이라 한 것은 백성에게 가르치는 '訓民'이란
말과 바른 소리 '正音'이라는 두 낱말을 어우른 말입니다. 正音은 俗音에 대립된
뜻으로 표준음의 뜻입니다. 글자의 명칭에 '文'이나 '字' 또는 '書'자를 넣어 훈민
정문 등으로 부르지 않고, 소리를 뜻하는 '音'자를 넣어 훈민정음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훈민정음 서문에서는 중국 글자를 가리켜
'문자'라고 하였고, 새로 만든 글자는 '予爲 此憫然, 新制二十八字' 라고 하여 '字'
를 쓰면서도 새로 만든 글자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고 '音'자를 썼습니다. 훈민정
음은 상형의 요소도 있지만 성음을 따라서 그 이치를 나타낸 글자임을 <제자해>
와 <정인지서>에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음의 이치를 담은 글자이기 때문에
'正音'이라고 '音'자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종은 세종 25년에 한글의 이름을 '훈민정음'('훈민정음'은 창제된 글자의 이름
을 나타내는 것과 글자를 만든 원리를 풀이한 반포용으로 펴낸 책의 이름을 나타
냅니다)이라 하여 공표하였지만, 한글을 속된 글자라고 경멸하는 당시의 일반 유
신들과 유생들은 아예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속된 글자로 일컬었으며, 한글에 따
로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여 '언문'(속된 글자)으로 이름삼아 일컬
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은 처음부터 언문이 이름 아닌 이름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세종의 명을 받고 편찬한 <훈민정음해례>와 각종 언해 운서에서는 '훈민정음'
또는 '정음'이라 일컬었는데 주로 '정음'이라 하였다. 예를 들어보면
* 정음 28자는 각각 그 꼴을 본떠서 만들었다.(<훈민정음>,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 이에 성조는 사성으로 하고 91운모, 23자모로 정하여 임금님이 지으신 훈민정
음으로써 그 소리를 정하였다.(<동국정운.신숙주서문>)
* 훈민정음에서는 치두음과 정치음의 나눔이 없다.(<홍무정운역훈> 권1 신숙주
<사성통고 범례>)
* 우리 세종 임금님과 문종 임금님께서는 이점을 애닯게 생각하시고 이미 훈민정
음을 만드시어 천하의 소리를 비로소 모두 적을 수 없는 것이 없었다.(<직해동자
습역훈평화 서>)

중종 22년(1527) 최세진이 펴낸 <훈몽자회>에서는 반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
다. 반절(反切)이란 한자의 두 자음을 반씩 따서 한자음을 표시하는 방식을 뜻합
니다. 예를 들어 '東'자의 음은 '德'의 초성 '다'와 '紅'의 중성과 종성 '옹'을 합쳐서
'동'이 되는 것이므로 '덕홍반' 또는 '덕홍절'이라고 표시하였다. '반어'나 '반절'의
이름은 없었으나 실제로 사용된 증거가 있으며, 반절법은 중국에서의 불경 번역
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승려가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한
세종이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양반들의 한자음을 이해하는데 알맞
은 교재인 훈민정음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우민용 학습교재인 반절(反切)을
따로 개발하였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 시대는 <훈몽자회>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영조 이후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 반절에 의해서 배우기 때문
에 한글을 '반절'이라 하였고, 그 후 계속해서 조선말기까지 백성들은 한글을 '반절'
또는 '언문'이라 하였습니다.

한문에 대하여 한글을 속된 글자로 여기는 일부 유생들은 한글을 언문이라 불렀
으며 이와 비슷한 이름으로 '언서'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문을 '진서'라
함에 대하여 정음을 '언서'라 한 것이다. 언문을 '언자'라고도 하는데 이는 <지봉
유설>과 <성호사설>에 나타나 있다. 또한 경상도 시골말에는 '언에', '은에'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
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게 된다'고 하여 '아침 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한편 한글의 이름 '훈민정음'과 책 이름 <훈민정음>까지도 고의로
'언문'이라 일러서 언문과 훈민정음을 혼동하면서 언문이란 글자 뜻에 끌려서 착
오를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사대부들은 우리 글자가 부녀자들이나 익히고 쓰는 글자라고 해서 '암클'이
라고 일컬었으며, 세종이 용변을 볼 때 창살을 보고 만들었다면서 '창살글자' 또는
'뒷간글자'라고 불리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한 최만리 등은
한자는 보기에 의젓한 좋은 예술스런 글자인데 반하여, 우리 글자는 마치 올챙이
가 기어가는 꼴의 '과두문자'라고 하기도 했다.

몇 학자들은 한글에 대해 특수한 이름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이상질은 그의 저서 <훈음종편>에서 한글의 이름 '훈민정음'이 글자와 소리를 함
께 이르는 이름이어서 글자와 소리를 나타내는 이름을 분별할 필요를 느끼고, 글
자 이름으로는 '훈문', 소리의 이름으로서는 '훈음'이라 하였습니다.
조선 말기의 강위는 그의 <동문자모분해>에서 한글의 이름을 '동문(東文)'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한제국시대 고종 3년(1894) 갑오경장 이후 한글을 '國文'이라고 불렀으며, 일제
시대에는 다시 '언문'이라 불리기도 하고 韓의 글자라는 뜻의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한글'이란 명칭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며 한글이란 명칭
이 언제 누구에 의해 비롯되었는지는 분명치는 않으나 주시경이나 최남선에 의하
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중 주시경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주시경은 '한나글, 한나라말, 한말, 배달말글' 등의 술어를 창안했는가 하면 '한글
모, 한글배곧' 등의 학회 명을 창안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박승빈 증
언처럼, 실용 이전에 최남선이 제의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체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한글이란 명칭이 최초로 쓰인 최고 기록은 1913년 3월 23일 배달말글 모임
이라 개칭했던 조선어문회를 이때 다시 '한글모임'으로 개칭한 데서 찾아 볼 수 있
습니다. 이후 한글이란 말이 보편화된 것은 1927년 <한글>지가 간행되고 훈민정
음 반포일을 '한글날'로 개정하게 된 뒤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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