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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우리말 표기 ㅡ 향찰 / 이두 ㅡ

鄭宇東 0 2442
옛 우리말 표기 ㅡ 향찰 / 이두 ㅡ 

 
우리는 중고교 국사시간에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어 글자가 없는 우리말을 표기하였다고 배웠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두는 뒤에 와서 아전 吏屬들이 공무를 처결하는 공문서 즉
吏書와 혼용되어 원래 우리나라의 말을 기록한다는 향찰(鄕札)의 뜻이 희석되
고 말았습니다.

이서(吏書)·이두(吏頭)·이토(吏吐)·이투(吏套)·이도(吏道)·이도(吏刀)·이찰(吏
札)·이문(吏文) 등의 이칭(異稱)이 있습니다. 이같은 호칭 가운데 문헌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이서(吏書)로,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
(帝王韻紀)》에 처음 언급됩니다. 이로 미루어 이러한 계통의 명칭은 고려시대
에 서리(胥吏) 계층이 형성되어 점차 공문서나 관용문에 쓰이면서 생긴 것으로,
신라시대에는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이두는 넓은 의미로는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 전체를 가리
키며 향찰(鄕札)·구결(口訣) 및 삼국시대의 고유명사 표기 등을 총칭하여 향찰
식 이두 또는 구결식 이두 등의 말로 쓰이기도 하나,
좁은 의미로의 이두는 한자를 한국어의 문장구성법에 따라 고치고(이를 통칭
誓記體表記라고 합니다) 이에 토를 붙인 것에 한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두는 신라 초기부터 발달(유리왕 때의 辛熱樂, 탈해왕 때의 突阿樂 등)한 것으
로추측됩니다. 문헌 자료에는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나오지
만 검증할 만한 증거는 없고 오히려 설총이 당시의 표기법을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향찰 [ 鄕札 ]

한국 민족은 태곳적부터 스스로의 사고와 감정을 나타내는 고유의 언어를 가지
고 있었으나, 그것을 표기하는 고유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은 훨씬 후대에 이르
러서였습니다. 즉, 조선시대 초기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기까지는 음운
(音韻)과 문법체계를 달리하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표현해야
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삼국시대에 이미 이루어진 향찰(鄕札) 또는 이두(吏讀)
인데 문자를 가지지 못한 신라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차용하여 말을 기록하
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이후에도 중국의 전통적인 한문체(漢文體)에 의한 문학활
동도 매우 왕성하여 이는 한글이 출현한 후에도 끊이지 않고 대략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말과 더불어 우리노래도 기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순수한 우리 글로 표현되지 못하고 향찰(鄕札) 및 이두(吏讀), 곧 한자(漢字)의
음(音:소리)과 훈(訓:새김)을 빌어서 표기되었습니다. 전래 문헌에 의하면 향가
의 뜻은 사뇌가(詞腦歌) 도솔가(兜率歌) 또는 국풍(國風) 자국지가(自國之歌),
즉 국가(國歌), 신라시대 고유의 노래, 동방 고유의 노래이며, 좁은 뜻으로는
신라의 가요 또는 고향의 노래 등 국문학자들의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권1의 사뇌격(詞腦格), 《삼국유사》 권2의 사뇌가,
《균여전(均如傳)》의 사뇌 ·사뇌자(詞腦者) 등 명칭에 대해서도 학자들의 이설
이 있으나, 이를 모두를 ‘사뇌’의 차자(借字)로 보고, ‘새내’는 동방(東方)이라는
뜻이므로 사뇌가는‘동방의 가요’라는 뜻으로 향가와 동의어(同義語)로 봅니다.
향가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서동요(薯童謠)》에서 고려 광종 때 균여의 《보현
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에 이르기까지 약 370여 년 동안 성행한 듯하나, 현
존하는 작품으로는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 도합 25수입니다.
 

우리 향가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일본의 소장학자 오꾸라 신페이(小倉進平)가 시작하여 향가와 "이두의 연구"로
박사가 되었는데 이런 우리글 연구를 일본사람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을 원통하
게 생각한 청년 무애 梁柱東이 육당 崔南善선생으로부터 귀중한 자료를 한보따
리를 넘겨받고 몇해를 연구하여 "고가연구"라는 방대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 연구는 기존의 일본학자들의 학설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하는 획기적인 것이
었으며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향가와 향찰연구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구결[ 口訣 ]

구결이린 한문 원전(漢文原典)을 읽을 때 그 뜻 및 독송(讀誦)의 편의를 위하여
각 구절 아래 달아 쓰는 문법적 요소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현토(懸吐) ·토(吐) ·석의(釋義)라고도 한다. 구결(口訣)이란 ‘입겿’ 또는 ‘입겾’
이라는 순 국어의 차자(借字)인데, ‘겿’ 또는 ‘겾’의 어원(語源)은 어떤 사물의
중요한 성질에 곁따르는 부차적인 성질의 뜻을 지닙니다. 구결이란 용어는
조선 세조 때의 문헌에 비로소 보이나 《세종실록》에도 세종 10년(1428) 윤
(閏) 4월 기해조(己亥條)에 권근(權近)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마지못하여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 등의 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주(註)에 한문을 읽을 때 국어를 구절에 달아 읽는 것을 토라 한다고 하였습
니다. 《문헌촬요(文獻撮要)》에는 구결 또는 석의가 정몽주(鄭夢周)와 권근에
의하여 이룩되었음을 밝히고 있으나 아마도 우리 민족이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
고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그것이 확립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서 설총(薛聰)이 이두(吏讀)를 지었다는 통
설과 함께 “방언으로 구경(九經)을 읽었다(以方言讀九經).”또는“속문(屬文)에
능하였다(能屬文).”“설총이 비명을 지었다(聰所製碑銘).”고 하는 기록은 그가
한문 해독과 작문에 능하고 또 당시 이두 또는 구결을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신라 때에도 구결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결은 隱(은, 는) ·伊
(이) ·乙奴(으로) ·乙(을) ·厓(애, 에) ·是面(이면) ·里五(리요) ·是於焉(이거든)
등과 같이 쓰이기도 하였지만 이를 약체화(略體化)하여 殳(은, 는:隱字의 좌변)
·厼(며:旀字의 우변) ·?(야:也字의 가로획) ·?(:飛字의 윗부분) ·人(이:是字의 아
래획) ·(면:面字의 윗획) ·?(나:那字의 좌변) ·亽(라:羅字의 半字 罖의 아랫부분)
·厂(애:厓字의 윗변) 등과 같이 한자의 한 부분을 떼어 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구결은 한문문장을 그대로 둔채 주로 한자의 음(音)을 이용하여 문장의 토나
문장의 단락을 종결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말법에 맞춘 한자어순을 따르는 이두
와는 그 사용 목적 및 내용에 있어서 이두와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이 구결은
훈민정음이 창제 ·사용되면서부터는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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